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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방에 가기'라는 주제로 글을 준비하면서 쓰고 싶었던 굵직한 이야기들은, 앞의 글들을 통해 대부분 풀어낸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은 제품의 '숨은 가격'—가격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사용하다 보면 어떻게든 우리에게서 돈과 시간과 수고를 빼가는 것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익숙한 내용이나 상식적인 내용도 많겠지만,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간다는 생각으로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당히 조야한 분류법이지만, '발생주의적 사고'와 '복식부기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이재(理財)에 밝고 '현금주의적 사고'와 '단식부기적 사고'에만 익숙한 사람은 이재에 어둡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시를 좀 들어볼 생각이었지만, 단순한 예시는 디테일을 껴안지 못하고 디테일을 충분히 살린 예시는 명쾌하지 않아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부자는 자산을 사고 빈자는 비용을 지출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현실상 자동차를 리스해 '비용처리'를 하는 부자를 흔히 볼 수 있으며 자동차는 비용(감가상각)과 자산(업무의 도구로 쓰이거나 내 시간을 절약해 줌으로써 직·간접적으로 수익을 창출함)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어 "이 예시 도저히 못 써먹겠어!" 하고 내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정말 쓸 만한 예가 없더군요. 교양회계 도서 저자 여러분, 존경합니다.(꾸벅)


 예시를 접어두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니 취미생활은 수익(profit)이 아닌 편익(benefit)을 얻는 활동이라 수익을 목표로 하는 기업경영과 다르고, 따라서 취미생활의 돈 씀씀이에 기업회계의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래서 발생주의와 복식부기의 개념 몇 가지로 글 한 편을 쓰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고, 걷잡을 수 없이 넓은 범위를 다루게 되어 버렸습니다.




 취미생활을 하는 커피 애호가도 참고할 만한 기업회계의 몇 가지 원칙(정의와 경향성)을 우선 살펴볼까요?


 1) 수익을 낼 수 있으면 자산, 수익을 낼 수 없으면 비용.

 2) 자산을 늘리는 것은 투자, 비용을 줄이는 것은 절약.

 3) 자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멸한다. 소멸한 자산은 비용으로 전환된다.

 4) 부자는 자산을 먼저 취득하고, 나머지 허용 범위 내에서 비용을 지출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잠깐 선을 긋자면, 기업이 올린 수익은 자산을 구입하는 데 재투자할 수 있지만 애호가가 얻은 편익(≒즐거움)은 환금성이 없으므로 재투자할 수 없습니다. 기업경영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리고 취미를 공유하지 않는 배우자가 보았을 때 애호가의 지출은 전부 비용입니다. 헛돈 쓴다는 소리죠. 제가 이런 결론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애호가의 즐거움을 편익으로 가정하고, 알뜰한 애호가의 몇 가지 원칙을 새로 만들어보았습니다.


 0) 애호가의 즐거움은 편익에 산입한다.

 1) 편익을 낼 수 있으면 자산, 편익을 낼 수 없으면 비용.

 2) ~ 4) 투자와 절약, 감가상각, 알뜰한 애호가의 경향성 - 위와 같음.

 5) 수명이 줄어들거나 다한 자산에 (재)투자를 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보다 오랜 시간(또는/그리고 더 많은) 편익을 낼 수 있다.

  5-1) 단, 이는 자산의 가치를 회복(또는/그리고 증대)한 것이지, 그동안 비용처리한 감가상각분을 자산으로 되돌린 것이 아니다. (즉, 지출한 비용은 여전히 비용으로 남는다)


 5)와 5-1)을 통해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자산(≒도구)을 하나 갖고 있는데 이게 좀 낡았다면 수리를 하는 식으로 기존 자산에 (재)투자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자산을 취득할 수도 있겠지요? 이 때 다음 사항을 계산해 보고—


 A) 기존 자산에 (재)투자를 하였을 때 자산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얻을 수 있는 총 편익

 B₁) (재)투자할 돈으로 새로운 자산을 취득하였을 때 (기존 자산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얻을 수 있는 총 편익)+(새 자산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얻을 수 있는 총 편익)

 B₂) 기존 자산을 매각하고 (재)투자할 돈과 기존 자산을 매각한 돈을 합쳐 새로운 자산을 취득하였을 때, 새 자산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얻을 수 있는 총 편익


 A가 B₁ 그리고 B₂보다 크면 기존 자산에 (재)투자하는 편이, B₁ 또는 B₂가 A보다 크면 새 자산을 취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자산을 팔아없애느냐 마느냐는 B₁과 B₂를 비교한 다음 결정할 수 있겠고요.


 그리고 자산을 취득할 때 다음 사항을 고려할 만하겠지요.


 6) 가격과 편익이 같거나 거의 비슷한 자산 둘(혹은 그 이상)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6-1) 수명이 긴 것이 좋다. (감가상각이 적으니까)

  6-2) 적은 (재)투자를 통해 가치가 많이 회복(또는/그리고) 증대되는 것이 좋다.

  6-3) 높은 가격에 되팔 수 있는 것이 좋다. (B₂를 선택할 때 도움이 되니까)


 저는 6-1)→6-2)→6-3) 순서로 우선 순위를 매기고 싶습니다. 추가적인 지출 없이 오랜 시간 편익을 낼 수 있는 자산이 가장 좋으니 6-1), 즉 수명에서 큰 우위를 차지하는 자산이 있다면 그것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지요. 차선책은 6-2)인데, 기존 자산을 매각하고 새 자산을 취득하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비용[각주:1]이 들어간다는 점, 그리고 자산을 원래의 목적(보유하고서 편익을 내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 그럴듯하다는 점에서, '매각하지 않고 그 가치를 회복·증대하여 더 쓸 수 있는 자산'이 '보유하는 것보다 매각하는 편이 더 나은 자산'보다 낫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3)이 그 다음 우선순위를 갖는 이유는,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값을 받는 쪽이 B₂를 선택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눈이 쉬어갈 수 있게 이쯤에서 문단을 끊고,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백만 원짜리 머신은 백만 원만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쓰면 머신 값 백만 원은 전부 비용이 된다.[각주:2][각주:3]

 나) 쓰는 동안 머신의 가치를 회복(또는/그리고) 증대하기 위한 추가 지출이 발생한다.[각주:4]

 다) 새 머신을 취득하거나 기존 머신을 매각할 때 유형/무형의 지출이 발생한다.[각주:5]

 라) 새로 취득한 머신이 값비싼 것이라면 구색을 맞추기 위한 추가 지출이 발생한다.[각주:6]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머신의 가치가 중고 가격에 그대로 반영된다면, 그 가치가 선형적으로 감소하든 그렇지 않든 중고 거래는 감가상각에 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머신의 가치가 중고 가격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고 과소평가되거나 과대평가되는 경우가 있다면 이를 이용할 수는 있겠습니다만(가치가 많이 남은 머신을 싸게 사거나, 가치가 조금 남은 머신을 비싸게 팔거나), 이런 작업을 감가상각에 대항하는 정식 수단으로 삼기는 좀 그렇습니다. 이걸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라면 중고 머신 상점을 열어 떼돈을 벌었겠지요.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 중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머신을 골라 한 방에 간다면, 생각보다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머신의 값이 싸니 가)항목의 비용이 줄고, 부품을 교환하거나 업그레이드할 때 그 값은 머신의 값을 어느 정도 따라갈 테니 나)항목의 지출 또한 줄어들 것입니다. 한 방에 갔으니 중고로 사고 파는 일이 없어 다)항목의 지출은 머신을 처음 살 때에 한해 발생하니 이 또한 줄어들고, 머신의 값이 싸니 라)항목의 구색을 맞추는 비용도 따라서 줄어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말 멀리까지 왔네요. 시리즈의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과소비는 악덕이지만, 현명한 소비는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르세요. 하지만 지르기 전에 아주 많이 생각하세요. 지르고 난 뒤 생각 끝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지르기 전에 고민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각주


  1. 기존 자산을 어떻게 팔 지, 무엇을 어떻게 살 지 의사결정하는 데 들어가는 유형/무형의 자원, 기존 자산의 매각과 새 자산의 취득에 따른 위험 부담 등. [본문으로]
  2. 이 단계부터 머신이 우리에게 백만 원을 요구하는 셈이고, 이후에 발생하는 지출이 붙으면 백만 원보다 큰 돈을 요구하게 될 것이란 소리입니다. [본문으로]
  3. 커피라는 취미생활을 계속하는 한, 머신을 중고로 팔아 돈을 받더라도 가)항목에 의한 비용 지출을 줄일 수는 없습니다. 편의상 머신의 내구연한을 10년으로 가정하고, 머신의 가치가 선형적으로 감소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백만 원짜리 머신을 10년간 쓰면 백만 원 전부가 비용이 됩니다. 백만 원짜리 머신 M₁을 3년 쓰다가 70만 원에 중고로 팔고, 다시 백만 원짜리 머신 M₂를 사서 7년 썼다면 M₂의 가치는 아직 30만 원이 남아 있겠지요. M₁을 3년 쓰면서 감가상각으로 30만 원이 나갔고 M₂를 쓰면서 감가상각으로 70만 원이 나갔습니다. 합치면 백만 원으로, 머신을 수명이 다 할때까지 쓸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4. 머신을 폐기하거나 매각하는 것보다, (재)투자를 하여 그 가치를 회복·증대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가 있습니다. 이 '바람직한 선택'을 해도, 어쨌거나 돈은 듭니다. [본문으로]
  5. 무엇을 어떻게 살 지, 기존 머신을 어떻게 팔 지 의사결정하는 데 들어가는 유형/무형의 자원, 기존 머신의 매각과 새 머신의 취득에 따른 위험 부담 등. [본문으로]
  6. 에스프레소 머신을 보급형에서 중급형으로 업그레이드했다면, 전동 그라인더 또한 중급형이나 고급형으로 업그레이드해야겠지요. 머신을 바꾸고 예전보다 맛에 더 민감해지면 탬퍼, 포타필터, 스티머 팁과 같은 부수기재도 업그레이드하게 되고… 디드로 효과가 발생하는 거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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