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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원두 이야기

핸드 소트를 합시다

느린악장 2014. 11. 3. 09:19

 구입을 하거나 선물을 받아서 집에 원두가 들어오면, 결점두를 골라내고, 냉동 보관할 원두는 소분해서 냉동실로 보내고 나머지는 상온 보관하는 게 정해진 순서입니다. (아, 물론 리뷰용 사진도 찍고요) 기록에 의하면(?!) 지난 1월 브라질 세하도 파인컵을 구입했을 때 이 순서대로 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년 11월에 구입한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블루마운틴 리뷰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 때도 비슷한 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고요. 제법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기도 하지만 핸드 소트를 하는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커피의 맛을 향상시킵니다.


 조금 섞여도 커피의 맛을 망칠 만한 결점두에는 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전에 번역한 글을 보면, 미성숙(immature), 퀘이커(quaker), 벌레 먹은 콩(insect-damaged bean) 등은 쓰고 떫은 맛을 냅니다. 태운 콩(절단면을 태운 콩, 채프를 태운 콩 등)은 탄맛과 쓴맛을 내고요. 이런 결점두는 눈으로 보고 집어낼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명확한 특징을 갖고 있으니, 핸드 소트로 걸러내면 커피 맛이 좋아지겠지요.


 하지만 핸드 소트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커피의 맛을 망치지만 눈으로 볼 때는 멀쩡한 결점두도 몇 종류 있어서(Rioy, Stinker, Rubbery, Funky) 집어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눈에 아주 잘 띄는 (따라서 골라내기도 아주 쉬운) 기형 콩(malformed bean), shell, 부서진 콩(damaged bean)은 상대적으로 맛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어 그만큼 핸드 소트의 효율을 떨어뜨립니다.


 또 다른 한계는, 일반적으로 좋은 원두에는 결점두가 많이 섞여있지 않아 핸드 소트로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가 적다는 점입니다. 좋은 생두를 볶으면 일반적으로 좋은 원두가 나오게 마련이고, 좋은 생두는 보통 핸드 소트를 철저히 한 물건이게 마련이니까요. 내가 산 원두가 좋은 원두라면, 핸드 소트를 대충 하고도 아주 맛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2. 수상한 이물질을 걸러내 그라인더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보험 같은 요소입니다. 내가 구입한 볶은 원두에서 돌이 나오는 경우는 정말 드문 경우입니다만(…) 단 한 개의 돌도 그라인더의 날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라인더는 이물질을 감지하면 멈춥니다만, 이물질이 이미 끼어버린 상황에서 날이 상하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지금까지 핸드 소트를 하며 1cm 안팎의 나뭇가지나 지푸라기 토막은 몇 개 집어낸 적이 있지만 아직 돌은 못 봤습니다. 하지만 한 개라도 건져낸다면, 그 날이 그라인더의 생명을 구한 날이 될 수도 있겠지요.




 3. 생두의 품질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가 골라내는 결점두의 양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결점두가 꽤 많은 원두가 걸리면 원두 200g에서 결점두 24g정도를, 무난한 원두가 걸리면 원두 200g에서 결점두 16g정도를, 결점두가 적은 원두가 걸리면 원두 200g에서 결점두 8g정도를 골라냅니다. 8g이면 제가 사용하는 15mL 계량스푼으로 두 스푼, 16g이면 네 스푼, 24g이면 여섯 스푼 정도입니다.


 그런데 항상 같은 기준으로 결점두를 골라내는 게 아니라, 결점두가 정말 많은 원두가 걸리면 평소에는 결점두라고 집어내던 것을 좀 남겨두게 되고(일일이 집어내기 귀찮으니까), 결점두가 정말 적은 원두가 걸리면 평소에는 집어내지 않던 것도 집어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얼마나 많은 결점두를 집어냈는가를 보면 그 로스터리가 사용한 생두의 품질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내는 결점두는 부서진 콩, 기형 콩, shell, 황갈색 콩(보통은 퀘이커), 벌레 먹은 콩, 쭈글쭈글한 콩(보통은 미성숙), 주름이 덜 펴진 콩(로스팅이 덜 된 것, 때로는 미성숙), 채프를 태운 콩, 탄 자국이 명확한 블리스터(blister), 실버스킨으로 뒤덮인 콩 정도입니다. 어지간히 싼 원두에도 이런 결점두가 10%이상 섞여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조금 빡빡하게 진행할 때는 모양이 좋지 않은 콩[각주:1]을 집어냅니다. 맛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지만, 보기 좋은 콩이 먹기도 좋다는 생각에서요. 조금 관대하게 진행할 때는 결점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콩(부서져나간 정도가 적거나, 블리스터에 탄 자국이 적거나, 실버스킨이 조금만 붙어 있거나…)이나 갈라짐이 두 줄인 콩 등을 남겨둡니다.


 저는 핸드 소트를 빡빡하게 진행했을 때 원두 200g에서 결점두가 8g정도만 나오면 정말 좋은 생두를 썼다고 판단하고, 관대하게 진행했는데도 원두 200g에서 결점두가 24g정도 나오면 싸구려 생두(일반 등급에서든 하이 커머셜에서든, 인건비를 줄여 가격을 낮춘 생두는 존재합니다)를 썼다고 판단합니다.




 4. 원두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핸드 소트를 하다 보면 원두의 빛깔과 형태가 눈에 익습니다. 처음에는 '이 정도 빛깔이 시티 로스트구나…' 하는 식으로 빛깔을 익히다가 나중에는 '시티 로스트라더니 색깔이 좀 짙은데? 좀 늦게 배출했나? 아니면 이 로스터리 성향이 좀 짙게 볶는 쪽인가?' 하는 식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지요. 원두의 빛깔로 로스팅 정도를 짐작하거나[각주:2] 원두 알의 굵기로 스크린 사이즈를 짐작하는[각주:3] 것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로스팅의 정확도와 균일도[각주:4]까지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커핑 훈련을 받고 감각을 계발하지 않은 사람이 한 잔의 커피에서 감지할 수 있는 맛과 향은 '커피 맛', '커피 향'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쓴 리뷰를 돌아보면 고소함을 평가하는 범주는 곡물, 견과류, 그 외의 구수함[각주:5] 정도고 촉감을 평가하는 범주는 다크초콜릿, 크림, 물 같은 바디감 정도. 산미는 과일(감귤)과 히비스커스 중 하나… 여기에 가끔씩 와인의 느낌이나 꿀 같은 달콤함 정도가 가감되는 게 거의 전부입니다. 연구개나 목젖으로 아로마를 감상하는 해괴한 커피[각주:6]가 가끔씩 튀어나오지만, 대개는 롯데리아의 햄버거 조합 같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맛과 향의 조합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커피 그 자체만 즐기다 보면 커피 생활이 밋밋해질 수 있습니다. 커피 생활의 모든 장면을 즐기는 것은 이에 대한 괜찮은 해결책이 될 수 있지요(물론, 커핑 훈련을 받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원두 봉투의 아로마밸브에 코를 대어 향을 맡아 보고, 핸드 소트를 하면서 원두의 생김새와 향을 감상하고,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면서 또 냄새를 맡고, 뜸을 들이면서 퍼지는 향을 맡고, 추출이 끝난 원두 가루를 펼쳐 말리면서 풍겨오는 향을 맡고… 이 모든 것을 커피쟁이의 즐거움으로 삼으면, 커피 생활이 꽤 재미있어집니다.


 한 잔의 커피가 풍기는 aroma에는 큰 차이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제 후각이 그리 예민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커피를 추출할 때 원두 가루에서 물로 옮겨가는 휘발 성분의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겁니다. 휘발성이 아주 강한 성분은 아로마밸브를 뚫고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고, 그 다음으로 강한 성분은 봉투를 열어 핸드 소트를 할 때 새롭게 감지되고, 그 다음으로 강한 성분은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 때 새롭게 감지되겠지요. 커피를 추출할 때 빠져나가지 않은 성분은 원두 가루를 펼쳐 말릴 때 감지될 테고요. 이런 '부수적인' 향기들이 한 잔의 커피 안에 들어 있는 향기보다 다채롭거나 매력적인 경우는 흔합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은 대단히 향기로운 커피입니다. 가위로 원두 봉투를 잘랐을 때 올라온 고소한 냄새와, 추출이 끝난 블루마운틴 가루를 펼쳐 말릴 때 방 안에 가득했던 꿀 냄새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맡은 향을 한 잔의 커피에서 '재확인'하려면 아주 열심히 맡아야 합니다. 이렇게 향을 맡아본 적 없이 곧바로 커핑에 들어가서 향을 감지하려면… 정말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겠지요) 저의 기억에 남은 블루마운틴의 향기는 이런 부수적인 향기들입니다.


 핸드 소트는 원두의 생김새를 살펴보고 부수적인 향기를 감상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생두의 품질과 로스팅의 상태를 짐작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고요. 다음에 원두를 사게 된다면, 여러분도 한 번 핸드 소트를 해 보세요. 괜찮은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주


  1. 센터컷 외의 자리에 갈라짐이 있거나, 센터컷이 지나치게 벌어졌거나, 센터컷이 중앙에 나지 않고 많이 치우쳤거나… [본문으로]
  2. 몇 달 보다 보면 하이 이하/시티/풀시티 이상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하는 3단계 분류는 가능해집니다. 하이 이하와 시티는 빛깔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고, 시티와 풀시티 이상은 빛깔과 오일이 배어나오는 정도를 보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3. 콜롬비아 수프리모, 케냐 AA, 탄자니아 AA,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No.1, 하와이 코나 엑스트라 팬시, 쿠바 크리스털마운틴 등은 스크린 사이즈를 기준으로 나가는 등급입니다. 알이 아주 굵죠. 스크린 사이즈 18 안팎입니다. 이런 원두를 보다가 에티오피아 원두나 중미 원두를 보면 알이 상당히 자잘해보입니다. 몇 달 보다 보면 스크린 사이즈 16이하/17-18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하는 2단계 분류는 가능해집니다. 굳이 자로 길이를 안 재 보더라도요. [본문으로]
  4. 건식 가공한 생두는 로스팅하였을 때 빛깔이 불균일한 경우가 많고, 약배전을 한 원두 또한 빛깔이 불균일할 때가 많습니다. 습식 가공한 원두를 시티 혹은 그 이상으로 로스팅하였는데 빛깔이 제각각이라면 로스팅을 할 때 화력 조절에 실패했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생두를 썼다는 소리겠지요. [본문으로]
  5. 건식 가공한 커피나 인도네시아 커피에서 감지됩니다. [본문으로]
  6. 르완다 마헴베, 인도네시아 블루 플로레스 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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