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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익-토플 변환 표처럼 SCAA-COE 커핑 점수 변환 표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분도 계시겠지만[각주:1] 이런 식의 일괄 변환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닙니다. SCAA의 10개 분야[Fragrance/Aroma, Flavor, Aftertaste, Acidity, Body, Balance, Sweetness, Clean Cup, Uniformity, Overall]와 COE의 8개 분야[Clean Cup, Sweet, Acidity, Mouth Feel, Flavor, Aftertaste, Balance, Overall]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거든요.


 SCAA에서 Fragrance/Aroma와 Flavor로 이원화된 향 평가 항목은 COE에서 Flavor로 일원화되어 있고, SCAA의 Uniformity[각주:2]라는 항목은 COE에 없습니다. 게다가 SCAA는 10개 분야에 1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겨 100점 만점의 총점을 구하는 것이고, COE는 8개 분야에 8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기고 기본 점수 36점을 더해 100점 만점의 총점을 구하는 것이라 점수의 분포도 다릅니다(물론 총점을 구할 때는 defect에 의한 감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편 SCAA의 Body와 COE의 Mouth Feel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도 됩니다.[각주:3]


 Defect가 없다는 전제 하에, 80점 턱걸이로 스페셜티 커피가 되려면 채점 영역에서 만점 대비 71.43%[각주:4]의 득점을 해야 하고 85점 턱걸이로 COE 커피가 되려면 만점 대비 76.56%의 득점을 해야 합니다. 턱걸이 스페셜티 커피와 턱걸이 COE 커피가 비슷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COE에 참여한 커퍼는 SCAA에서 활동할 때보다 점수를 좀 더 짜게 주어야만 합니다. 턱걸이 COE가 턱걸이 스페셜티보다 낫다는 평을 받으려면 더욱 짜게 주어야 하고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채점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COE에서는 본격적인 커핑을 하기 전에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각주:5]을 한다고 합니다. 트레이닝 샘플로 먼저 커핑을 한 다음, 헤드저지가 '이 샘플의 점수는 ○○점이 타당합니다. ○○점 미만은 너무 낮고 ○○점 이상은 너무 높으니 수정을 부탁드립니다.'하는 식으로 평가 기준을 '맞추는' 것이죠.


 이러한 미묘한 채점 기준 문제와, 향에 대한 비중의 차이 문제 때문에 SCAA-COE 커핑 점수 변환 표를 만드는 건 힘든 일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한 일이기도 합니다. SCAA 커핑 점수 92.3점을 받은 커피와 COE 커핑 점수 92.96점을 받은 커피는 채점 영역에서 모두 89%수준의 득점을 올린 커피입니다. 둘 중 누가 더 맛있을까요? 커퍼들이 모여서 두 종류의 커피를 동일한 기준에 맞추어 점수를 매기고 평균을 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향이 점수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SCAA 기준으로 점수를 냈을 때와 COE 기준으로 점수를 냈을 때의 순위(우열)가 뒤집어질 수도 있고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둘 다 맛있기야 하겠지…' 정도가 고작일 겁니다.


 COE기준으로 80점을 간신히 넘긴(따라서 COE 기준에 미달되는) 커핑 결과를 근거로 "80점을 넘겼으니 스페셜티!", 혹은 1편에서 비판했던 출처불명의 자료를 바탕으로, "76점을 넘겼으니 COE기준 스페셜티급!"라는 광고에 낚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에 올릴 글을 노트에 써 놓으면서, 위 문장에 "(아직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친 판매자를 만나지는 않았지만…)"이라고 써 놓고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하던 중, 없을 것이라 믿었던 이런 종류의 장난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해당되는 판매자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판매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은 상황에서 쓴 글이니 굳이 표현을 수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뇨, 커핑점수가 80점(SCAA 기준)이어야 합니다. COE기준 80점은 그냥 COE 기준 미달인 커피고, 그게 답니다.


 대단히 놀라운 건, 이 로스터가 <한국의 커피 로스터>[각주:6]라는 책에서 (저자와 인터뷰를 할 때) "로스팅 후 컵테이스팅 방법 : SCAA 커핑프로토콜 적용"이라고 밝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해당 쇼핑몰에서 팔리고 있는 콜롬비아 산추아리오 부르봉과 같은 상품의 커핑 점수 항목을 보면 <Clean Cup, Sweet, Acidity, Mouthfeel, Flavor, Aftertaste, Balance, Overall>이 나와 있지요. 8항목입니다. 로스터는 SCAA기준을 사용한다고 밝혀놓고서 실제로는 COE기준으로 커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원론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결국 커피는 생두를 볶아서 추출하는 과정을 거쳐 만드는 겁니다. SCAA나 COE의 커핑 점수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생두를 볶아 각자의 기준에 따라 추출해서 채점한 것이고, 이는 생두의 '가능성' 혹은 '잠재력'에 점수를 매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볶는 과정과 추출하는 과정이 달라지면 SCAA나 COE의 커퍼가 마셨을 그 맛이 안 나올 테니까요. 혹시라도 커핑 점수 높게 받은 생두의 확보에만 주력하고 로스팅 기술 연마에 게으른 판매자가 있다면, 또 혹시라도 커핑 점수 높게 받은 원두 구하기에만 주력하고 커피 추출에 신경쓰지 않는(분쇄된 상태로 구입해 대충 관리하면서 두고두고 꺼내 커피메이커로 내린다든가!) 호사가가 있다면, 아마 생두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할 겁니다.


 커핑 점수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기에 좋은 도구입니다. 엘 인헤르토(El Injerto)는 COE의 대표적인 수혜자이고, 커핑점수 90점을 넘긴다는 나인티플러스 커피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지요. 반면 커핑 점수는 신화를 무너뜨리는 데도 쓸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지방의, 혹은 그 농장의 커피가 얼마나 유명했고 호사가들에게서 좋은 평을 받았으며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는지는, 올해의 뉴 크롭 커핑 점수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커피에게 점수가 따라잡히면 망신을 당하고 신화에는 금이 가겠지요.




 나인티플러스라는 이름의 뜻은 "커핑 점수 90점을 넘기는 커피"입니다. 다만 어떤 커핑폼으로 90점을 넘긴다는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처음 작성한 2013년에는 SCAA 커핑인 줄 알았지만, 2015년 8월에 다시 이 글을 읽고 확인해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커피 리뷰의 리뷰에서 90점 이상을 받은 커피라는 의미로 나인티플러스를 쓰는 것 같습니다. 커피 리뷰(Coffee Review)의 커핑 점수는 상당히 후한 편인데, 2014년에 진행한 커피 리뷰 346개를 훑어보면 한 페이지에 20개씩 있는 리뷰 중에 80점대 점수를 받은 커피는 한둘에 지나지 않습니다(그나마도 88, 89점 같은 80점 후반대입니다). 94점 정도는 받아야 준수한 편에 들고 그 해의 TOP 30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생깁니다. 역대급(Top ** of all time)이 되려면 97점을 받아야 하고요(아직 98점이나 그 이상의 점수를 받은 커피는 없는 것 같습니다).


 GBT커피에서는 L7, L12, L21, L39, L95와 같은 방식으로 나인티플러스 커피에 레벨을 매겨서 팝니다. 나무사이로에서는 레벨 없이 프로세싱 분류(W2, H2, N2 등)만 표기하고요. 나인티플러스가 자리를 잡기 전에는 커핑 점수를 마케팅 수단으로 삼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브랜드 파워를 바탕으로 틈새시장─SCAA나 COE 커핑이 놓치고 있는 영역의 맛과 향─을 공략하는 것 같아요.



 농부가 땀 흘려 일을 해 질 좋은 커피를 생산하여 높은 커핑 점수를 받고, 판매자는 그것을 공정한 가격에 구입해 정성껏 로스팅하여 팔고, 소비자는 그것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서 맛있게 내려 먹는다면 이처럼 바람직한 일도 없을 겁니다. 마치 공익광고의 한 장면 같네요. 하지만 공익광고에 등장하는 장면의 바람직한 정도와, 그 장면을 우리 삶의 면면에서 실제로 목격할 확률은 반비례하기 때문에(…) 저런 장면을 쉽게 볼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런 게 가능하다고 알리는 데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는 있겠군요.


 왠지 이쯤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일은 커핑 그 이상의 예술적 행위…"어쩌고 하면 좀 멋있는 마무리가 될 것도 같지만, 지금까지 써온 글과 커핑의 의미를 한방에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기승전좋은게좋은거 스타일의 전개는 피해야겠습니다. 취미생활을 하며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데이터와 실용성을 기준으로 삼은 선택과, 감성과 만족감을 기준으로 삼은 선택은 저마다의 장점이 있을 것입니다. 위 문단에서는 '커핑 점수'를 바탕으로 전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이 글 전체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도 그것이었고요. 그러니까 저는, 믿음직한 판매자나 찾아보고(이왕이면 커핑을 자주 하는 판매자였으면 좋겠네요) 저의 추출 실력이나 연마해야겠습니다.




 각주


  1. 1편에서 비판했던 국내 웹 자료 중 SCAA의 Super Premium Specialty와 COE의 Presidential Honor, Premium Specialty와 COE Coffee등을 각각 같은 열에 배치한 표가 본의 아니게 SCAA-COE 변환 표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2. 균일성이나 일관성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원두 샘플 당 적어도 5잔의 커피를 만들게 되어 있는데, 각 잔의 커피가 제각각의 맛과 향을 낸다면 이 점수는 낮게 나옵니다. [본문으로]
  3. 다소 오래된 COE 관련 사이트에 의하면 Mouth Feel은 'the tactile sensation imparted by a coffee'로, SCAA의 Body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과 같습니다. http://www.ezykids.com/WhatisCOE/CompetitionProtocols/CuppingForm/tabid/186/Default.aspx [본문으로]
  4. 다구치 마모루의 <스페셜티 커피대전>(pp.149-150)에 의하면, SCAA의 10개 분야 중 Sweetness, Clean Cup, Uniformity의 3개는 "자동으로 기초점이 10점씩 부여된다"고 합니다. SCAA의 '기본 점수'는 30점인 셈이죠. 나머지 7개 영역에서 평균 7.143점을 얻으면 총점 80점을 넘길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5. 다구치 마모루 지음, 박이추·유필문 이정기 공역 (2013) <스페셜티 커피대전>, 형설. pp.148-149. [본문으로]
  6. 강대영·민승경 지음, (2012) <한국의 커피 로스터> 서울꼬뮨. (해당 부분 : p.10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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