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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뜨막했던 "원두 이야기"에 새 글을 올려야겠다 싶어서, 글감을 하나 발굴했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할 무렵에 올렸던 <형용사 지도를 활용한 커피 원두의 선택>의 후속편쯤 될 겁니다. 주요 커피 산지에 대한 저의 생각과 감상을 적고, '이런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이 원두를 주문하니 좋았더라'는 식으로 평가를 하게 되겠지요. 예전에 쓴 글이 자료 분석을 바탕으로 원두 선택의 기준을 세웠다면, 이번 글은 경험을 바탕으로 원두 선택의 기준을 세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제가 블로그에 써 올린 원두 리뷰는 총 58건입니다. 그 글들을 살펴보면 제가 다음 나라의 원두를 자주 사 마셨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 12건의 리뷰

 과테말라 : 7건

 브라질 : 5건

 콜롬비아 : 5건

 인도네시아 : 4건

 파푸아뉴기니 : 4건

 엘살바도르 : 3건

 케냐 : 3건

 코스타리카 : 3건


 3건 이상 리뷰를 쓴 나라만 취합하니 9개국 46건입니다. 적어도 3건의 리뷰 경험은 있어야 그 나라 커피의 특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할 수 있지 않을 까 싶어, 리뷰 경험이 1~2건에 불과한 나머지 나라들은 일단은 제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나라들도 나중에 리뷰가 쌓이면 리스트에 들어오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요.


 <커피 산지 순례, 그 멀고도 험한 길>을 쓰며 인용했던, <한국의 커피 로스터>[각주:1]의 리스트와 비교해 보면, 저의 취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1) 케냐 푸대접

 2) 에티오피아는 역시 보편타당해

 3) 믿고 마시는 과테말라

 4) 브라질 좋아요

 5) 비주류 산지 좋아요 : 파푸아뉴기니, 파나마, 엘살바도르




 <싱글 오리진, 알다가도 모를 분류>의 [1편], [2편]에서 논한 바 있지만, 커피 산지를 나라 단위로 싸잡아서 "이 나라의 커피는 이러이러하다"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대체로 맞는 이야기일 수는 있어도, 적지 않은 반례─세상을, 그리고 인식을 다채롭고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들을 놓칠 수밖에 없거든요. 마이크로 로트, 스페셜티 커피, COE 커피에는 이러한 나라 단위의 일반론이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리뷰를 작성하면서 '브라질 같은 고소함'이나 '시다모를 닮은 고구마'와 같은 표현을 가끔씩 쓴다는 점에서—그러니까, 커피의 맛과 향을 표현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될 수 있고 커피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나라 단위의 일반론의 쓸모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론 하나쯤 다듬어보는 일도 괜찮은 작업이 될 수 있겠지요.




 <유전 대 환경, 그 영원한 이야깃거리>에서 논한 대로,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원두의 품종, 재배 환경[각주:2], 농법[각주:3], 수확법[각주:4], 가공법, 로스팅, 유통 및 보관 환경, 추출법 등을 들 수 있죠. 여기에 '나라'는 없습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품종, 기후, 농법 등이 제각각일 수 있으니까요.


 특정 산지의 커피가 특정한 캐릭터를 추구한다면, 결과적으로 특정한 나라나 지방의 커피가 특정한 맛과 향을 낼 수는 있습니다. 콜롬비아 커피는 대체로 마일드합니다. 하지만 콜롬비아라는 나라가 콜롬비아 커피의 맛과 향에 직접 영향을 주는 건 아닙니다. 농부들이 '콜롬비아다운' 맛을 내기에 적합한 품종·농법·수확법 등을 찾고, 생두 판매자가 '콜롬비아다운' 맛이 나게끔 생두를 배합하고[각주:5], 로스터가 '콜롬비아다운' 맛이 나는 로스팅 포인트에 맞추어 원두를 볶은 노력이 한데 모인 결과죠.


 특정 산지의 커피가 특정한 캐릭터를 추구한다면 마케팅하기는 쉽습니다. 마일드 커피를 찾는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싶다면 콜롬비아 커피를 들여놓으면 되거든요. 이런 경우에는 일반론은 상당히 잘 들어맞을 겁니다.


 하지만 농장주 입장에서 그냥 콜롬비아 커피가 아닌 "우리 농장"의 커피, 원두 판매자 입장에서 그냥 콜롬비아 커피가 아닌 "우리 가게"의 커피를 팔고 싶다면 차별화가 필요하겠죠. 품질로 차별화할 생각이라면 그 커피가 그냥 '콜롬비아다운' 커피여서는 안 될 겁니다. 좀 독특한 커피여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론이 잘 맞지 않을 겁니다.


 결국—'콜롬비아다운' 커피든, '콜롬비아답지 않은' 독특한 커피든—콜롬비아 커피의 특성은 콜롬비아의 자연 환경[각주:6]보다는 콜롬비아 커피를 둘러싼 사람들의 손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셈입니다. 어찌 보면 농산품보다는 공산품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 에티오피아


 제가 지금까지 리뷰한 에티오피아 원두를 몇 가지 범주로 묶어 보면 다음과 같을 겁니다.


 ㄱ) 비교적 전형적인 에티오피아 습식 (이르가체페)

 ㄴ) 비교적 전형적인 에티오피아 건식 (하라, 짐마)

 ㄷ) 고구마 같은 에티오피아 원두 (시다모)

 ㄹ) 독특한 에티오피아 원두 (게마드로, 구마르, 베베카)

 ㅁ) 리뷰한 적 없지만, 주목할 만한 고급 원두 (나인티플러스)


 에티오피아의 커피를 몇 마디 말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단 품종이 다양하고[각주:7] 에티오피아 자체가 특정한 캐릭터를 추구하는 나라도 아니어서 그 맛과 향이 제각각이거든요. 그래도 한·중·일을 '그나마 공통점이 많으니' 동북아 문화권으로 묶는 것처럼 그나마 공통점이 많은 산지를 몇 가지 범주로 묶어보는 시도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ㄱ)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는 '비교적 전형적인 에티오피아 습식'으로 칭할 만합니다. 이들은 산미가 좋은 마일드 커피에 가깝습니다. 감귤 같은 산미, 볶은 곡물(특히 깨) 같은 고소함, 가벼운 바디 같은 특징을 공유합니다.


 ㄴ) 에티오피아 하라, 짐마는 '비교적 전형적인 에티오피아 건식'으로 칭할 만합니다. 제가 '와인의 느낌'이라고 부르는 특성과, '복합적인 맛'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양상의 맛과 바디감, 콤콤한 냄새 같은 특징을 공유합니다.


 ㄷ) 에티오피아 시다모는 익히지 않은 고구마를 자른 절단면에서 나는 듯한 냄새와 익힌 고구마의 고소함과 달콤함이 섞인 듯한 aroma를 풍깁니다. 이러한 특성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시다모의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ㄹ) 위드오 원두 3종(게마드로, 구마르, 베베카)은 이르가체페, 하라, 짐마, 시다모에 나타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3종끼리도 특성을 거의 공유하지 않습니다. 게마드로는 우유 같은 바디감, 포도 같은 산미, 비교적 강한 단맛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지닙니다. 구마르는 쌉쌀하면서도 뒷맛이 달고 깔끔하며, 산미는 강하지 않고 부드럽고 산뜻합니다. 베베카는 '달콤쌉쌀', '깔끔함', '부드러움'으로 요약되며, 쿠바 크리스털마운틴[각주:8]의 좋은 특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ㅁ) 나인티플러스 원두는 커핑 점수가 90점 이상인 고급·고가의 원두입니다(어느 기준의 커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비교적 전형적인 에티오피아 커피와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닐 것으로 기대됩니다.


 같은 그룹에 속하는 커피끼리도 조금씩 특성이 다릅니다. 이르가체페는 다섯 번을 리뷰했는데 그 개성이 제각각이었습니다. 카페뮤제오의 이르가체페와 클럽 에스프레소의 이르가체페처럼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지만 그 비중과 강도가 확연히 다른 경우도 있고—둘 다 고소함, 산미, 비교적 가벼운 바디감을 가졌지만 카페뮤제오의 이르가체페는 산미가 적당하여 무난했고 클럽 에스프레소의 이르가체페는 혀가 찌르르할 정도의 산미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커피밤의 이르가체페커피플랜트의 이르가체페처럼 전형적인 에티오피아 습식에서 조금 벗어난 특징을 지닌 경우도 있었습니다—커피밤의 이르가체페에서는 와인의 느낌이 났고(보통 와인의 느낌은 에티오피아 건식이나 케냐에 기대할 만한 특성입니다), 커피플랜트의 이르가체페에서는 오렌지를 닮은 향기가 제법 강하게 났습니다(게샤의 감귤 같은 flavor보다는 조금 약하고 훨씬 자연스러웠습니다)—. 맨 처음 리뷰했던 쿠아모스의 이르가체페는 좋은 의미에서 무난한 커피였고요.




 에티오피아 커피는 에스프레소 용도로는 별로 쓰이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 습식은 강배전에 적합하지 않고[각주:9], 건식은 케냐라는 무난한 대체재[각주:10]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대신 핸드드립이나 프렌치프레스 같은 용도로는 많이 쓰입니다. 아메리카노나 인스턴트 커피와는 확실히 다른 특성을 추구하기에 적합한 원두고, 케냐나 만델링처럼 강렬하지 않아 여러 사람에게 두루두루 어필할 수 있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때문에 에티오피아 커피가 입문용으로 추천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초보자나 마시는 커피'로 좌천(?)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티오피아 습식의 보편타당함과 에티오피아 건식의 에스닉함, 그리고 전형적이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독특함을 사랑합니다. 이르가체페를 다섯 번 리뷰했지만 여섯 번째 이르가체페가 기대되고, 에티오피아 건식을 두 번 리뷰했지만 또다른 건식을 찾아 맛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농장, 새로운 조합, 새로운 지역의 새로운 커피를 찾아 끊임없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나라, 커피 애호가의 고향이면서도 여전히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나라,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없는 나라, 에티오피아의 커피를 살펴 보았습니다. 조만간 다음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각주


  1. 강대영·민승경 (2012) <한국의 커피 로스터> 서울꼬뮨. [본문으로]
  2. 햇빛, 강우량, 고도(와 이에 따른 일교차) 등. [본문으로]
  3. Shade grown coffee, sun grown coffee. [본문으로]
  4. 골라 따기, 훑어 따기(혹은 고르지 않고 따기), 기계로 수확하기 등. [본문으로]
  5. 농장마다 조금씩 맛과 향이 다르기 때문에, '콜롬비아다운' 맛과 향을 내기 위해서는 '콜롬비아다움'을 정의하고, 그 정의에 부합하게끔 이 농장 저 농장의 생두를 배합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콜롬비아 수프리모 같은 나라 단위의 커피, 콜롬비아 나리뇨 같은 지역 단위의 커피 모두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6. 콜롬비아 전체의 자연적 특성. 각 농장의 미기후(微氣候, microclimate)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으로]
  7. 생산성 좋은 카투아이나 카투라 같은 품종이 득세하고 있는 오늘날, 온갖 토착종(Mixed Heirloom)을 꿋꿋이 기르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죠. 생두의 품종이 한 잔의 커피의 맛과 향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인 경우는 거의 없지만(게샤 정도만이 예외가 될 겁니다), 그렇다고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으로]
  8. 크리스털마운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입니다. 다크초콜릿과 같은 aroma, 고소한 향, 결이 부드러운 산미, 달콤한 뒷맛과 같은 좋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9. 명동 탐앤탐스 블랙 눈스퀘어점에서 이르가체페 싱글오리진을 주문해서 마셔본 적이 있었는데, 이르가체페가 타고 남은 흔적이라 불러도 전혀 심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습니다. 에스프레소 블렌딩의 베이스로는 당연히 부적합하고, 소량을 섞어 포인트를 주는 용도로도 별로 좋을 것 같지가 않네요. [본문으로]
  10. 케냐 습식은 (에티오피아 건식이 지니게 마련인) 와인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결점두가 훨씬 적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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