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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포트 브루 커피를 한동안 애용하다가, 주전자를 씻어 말릴 틈도 없이 바쁜 하지만 사흘에 하나씩 포스팅할 만큼은 한가한 일이 생겨 빠른 시간 안에 설거지를 마칠 수 있는 추출법을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분쇄된 원두를 담은 차망을 텀블러에 걸쳐놓고 물을 부어 우려낸 다음 차망을 건져내는 것이었죠. 이른바 프렌치 프레스(French Press)가 거름망을 눌러 커피 가루를 걸러내는 추출법이라면, 이 방법은 차망을 건져내 커피 가루를 걸러내는 추출법인 셈입니다.


 프렌치 프레스에 대한 대구 혹은 대응으로 코리안 리프트(Korean Lift)라고 이름붙여볼까 하다가, 차망을 한국에서만 쓰는 것도 아닌데 커피 리프트(Coffee Lift)가 좋지 않을까, 아니면 추출 방식을 설명하는 직관적인 이름인 브루 앤드 리프트(Brew and Lift)가 좋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떠다녔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딱 드는 이름은 없었지요. 밴드 이름 짓느라 몇 달씩 고민할 시간에 연습이나 하는 게 남는 장사이듯(ㅋㅋㅋ) 추출법 이름 짓느라 몇 달씩 고민하느니 포스팅이나 하자 하는 마음으로 쓰게 된 게 이 글입니다.


 격식과 아름다움을 갖추자면 이중벽 구조로 된 유리잔에 딱 맞는 인퓨저를 세팅해야겠습니다만(이런 목적으로 사용할 만한 세트가 기성품으로 존재합니다), 시간이 없어 고안해낸 추출법이니 비주얼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찬장을 좀 뒤적이다가 그동안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던 스타벅스 플라스틱 텀블러에 찻주전자의 차망을 걸치면 딱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우려보았습니다.



 간편성을 추구하는 방법이므로 예열 따위는 생략합니다. 플라스틱 텀블러는 금속 재질의 텀블러에 비해 물의 열기를 덜 빼앗(을것 같)으므로, 평소에 잘 안 쓰던 플라스틱 텀블러를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펄펄 끓는 물을 들이붓고, 티포트 브루 커피를 우려내듯 4분+@ 동안 추출하면 완성입니다.


 티포트 브루 커피에 근접한 맛과 향이 느껴졌습니다. 티포트 브루 커피는 찻주전자에서 잔으로 옮겨담는 과정에서 미분의 상당량이 걸러지지만, 이 방법은 텀블러에서 우려낸 다음 그대로 마시기 때문에 잔 바닥에 미분이 상당히 많이 깔립니다. 그래서 마시는 동안 잔이 흔들리면 미분이 떠올라 맛이 좀 텁텁해집니다만, 얌전히 마시면서 미분을 가라앉히면 밑바닥으로 갈수록 진한 맛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바닥에 가라앉은 미분에서 맛이 우러나오는 걸까요? 프리미엄 스틱커피에 물에 녹지 않는 커피 미분이 들어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까요?


 다시백으로 추출하는 티백 커피와 비교하면, 이 방법은 개수대를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이나 집과 같은 장소에서 하루에 여러 번 커피를 마실 때 이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시고 나서 차망을 (그리고, 이왕이면 텀블러도) 씻어 말려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분쇄된 원두를 차망에 옮겨담는 일은 티백을 만들어 포장하는 일보다 훨씬 쉬우니까요. 이런저런 이유로 커피 소비량이 많다면 분쇄된 원두를 여러 종류 준비해서 그때그때 수요에 맞춰 블렌딩하는 유연성도 발휘할 수 있습니다. (1회분 8g은 15mL 계량스푼으로 두 스푼인데, 케냐 한 스푼에 콜롬비아 한 스푼을 넣어 블렌딩한다든가…)


 …역시 최후의 승리자는 귀차니즘인 것 같습니다. 이 방법이 맛은 좀 아쉬워도 훨씬 편하기 때문에 며칠째 텀블러와 차망으로 커피를 추출하고 있습니다. 찻주전자로 커피를 우리고, 구리 냄비로 커피를 끓이던 때가 생각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여유가 있던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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