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배전을 좋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강배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2013 카페&베이커리 페어에서 구입한 케냐 AA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뜨거운 물로 추출해 금방 마시기에는 너무 강하고 자극적이었기 때문이죠. (블렌딩이란 것에 처음 도전한 계기도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 된 셈입니다) 그러다가 유리 약탕기로 커피를 빨리 식히는 방법을 고안해 뜨거운 물로 추출한 커피를 차게 식혀 보관해 마시게 되면서 조금씩 강배전이 그리워졌습니다. 약배전이나 중배전에 해당하는 원두로 추출한 커피는 차게 식혀 마실 때 밋밋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얼마 전 주문한 풀시티 탄자니아는 뜨거운 물로 추출해 금방 마셔도, 차게 식혀 마셔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풀시티를 다시 보게 된..
컵 오브 엑설런스(Cup of Excellence, COE) 2014 경매 결과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쓴 글이 생각나서, 올해도 한 번 작성해 보았습니다. 눈에 익은, 혹은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농장 이름이 늘어나는 걸 보니 저도 슬슬 본격적인(?) 커피 애호가가 되어가나 봅니다. LAF Green Bean이라는 회사는 알마씨엘로가 되었습니다. GSC International은 작년 리스트에는 보이지 않던 생두 무역 회사인데, 올해 많은 경매를 따 냈습니다. 엘 인헤르토까지요! (2013년의 엘 인헤르토를 일본 UCC社가 가져간 걸 보고 작년에는 약이 좀 올랐습니다) 로스팅하우스, 모모스 커피, 주빈커피, 커피 리브레, 테라로사(가나다순)같은 로스터리는 올해도 경매에 참여했고, 작년에 이름..
로스팅 정도를 표현하는 말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통용되는 것이 라이트-시나몬-미디엄-하이-시티-풀시티-프렌치-이탤리언의 8단계입니다. 외국의 문서를 읽다 보면 New England(라이트 정도), Viennese(풀시티 정도), Turkish, Neapolitan, Spanish(앞의 셋 모두 프렌치~이탤리언 정도)와 같은 표현도 접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커피 생활을 하는 동안 구입하는, 에스프레소용이 아닌 원두의 로스팅 정도는 사실상 5개 단계—미디엄, 하이, 시티, 풀시티, 프렌치의 범위 안에 있게 마련이고 그나마도 미디엄과 프렌치는 드물어서 대부분의 로스팅은 하이에서 풀시티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 시티, 풀시티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탓인지('도시 볶음'이라면 대체 ..
웹서핑을 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을 가끔 마주칠 수 있습니다. -○○○ 원두는 카페인이 적다. -로부스타 원두는 (아라비카보다) 카페인이 많다. -로부스타를 사용하는 인스턴트 커피에는 카페인이 많다. -에스프레소는 원두와 물이 접촉하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카페인이 적다. -더치 커피는 원두를 뜨거운 물이 아닌 찬물로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이 적다. 카페인의 (과다한) 섭취가 건강에 별로 좋지 않고 따라서 카페인이 적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몸에 좋다(=그나마 해를 덜 끼친다)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미리 찬물을 끼얹고 가자면, 특정한 원두가, 또는 특정한 추출법으로 추출한 커피가 카페인이 많거나 적다는 주장에는 별 근거가 없거나 틀린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커피를..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원두의 품종, 재배 환경, 농법, 수확법, 가공법, 로스팅, 유통 및 보관 환경, 추출법… 이 중에서 마케팅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을 두 가지 꼽는다면 산지(←재배 환경)와 원두의 품종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세계 3대 커피'는 단지 자메이카, 하와이, 예멘 바니 마타르에서 생산되었다는 이유로, 특히 한국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블루마운틴은 자메이카의 국가적 관리를 받고, 예멘 스페셜티 커피 상회(Yemen Specialty Coffee Ltd.)를 통해 수출되는 커피는 2~3회에 걸쳐 결점두를 골라 내는 등의 QC를 받기는 합니다만, 잘 해 봐야 '하이 커머셜'—일반 등급의 커피 중 상등품에 속하는 정도..
원두를 구입해 커피를 추출해 마시는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열 달이 지났습니다. 판매자의 웹사이트를 열심히 돌아다닌 시간도, 프로모션의 기회를 잡고 쿠폰을 쓰기도 하며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원두를 사려는 머리싸움을 한 경험도 그만큼 쌓였습니다. 그리하여 판매자를 훌륭하게 벗겨먹는 쇼핑의 기술을 다루는 글을 한 편 쓸 정도가 되었습니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고, 오늘의 떡밥입니다. "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地理的)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적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化合)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할 때 아군에 유리한 좋은 때를 잡았어도 적이 우리보다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으면 승리하기 어렵고, 아군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어도 적들이 한 마음으로 뭉쳐 있다..
요리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가끔씩 요리사가 "찬장에 ◯◯◯ 하나쯤은 다 있으시죠?" 하면서 신기한 재료를 꺼낼 때가 있습니다. 육두구라든가, 바질이라든가, 그레나딘 시럽이라든가… 그럴 때면 마음 속으로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를 외치고 싶어지지요. 커피 생활이 길어지면서, 저희 집 찬장에는 두 종류의 원두를 담을 용기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백화수복 원컵에 뚜껑을 자작한 밀폐용기를 썼습니다. 이 때가 작년 10월 5일이었죠. 하지만 밀폐성능이 시원찮아 향이 달아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찬장에서 잠들어 있던 진공 밀폐용기를 꺼내서 쓰게 됩니다. 쿠바 크리스털마운틴을 구입한 날부터니까 10월 29일입니다. 진공으로 보관하는 이득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오를 무렵 친구로부터 선물..
반반커피 프로젝트 그 첫번째 글을 올리고 넉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지요. 마음에 들었던 조합도 있었고, 그저 그런 조합도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한 번쯤 중간결산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셔본 반반커피 중에 인상적이었던, 또는 반응이 좋았던 조합 몇 가지를 모아 보았습니다. 먼저 소개하고 싶은 두 가지는 강렬한 맛이 나는 조합입니다. 1. 에티오피아 하라 + 인도네시아 만델링 일명 커피계의 막사. 쌉쌀함이 강하고 그 결이 거칠어 뭔가 제각기 날뛰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기름기 많은 식사를 하고 나서 한 잔 마시면 입안이 개운해지고 느끼함이 싹 씻겨나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삼겹살이나 자장면을 먹고 난 뒤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식사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반반커피 프로젝트는 블렌딩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접근법을 제시하여 주고() 섞는 원두를 둘로, 섞는 비율을 반반으로 고정하여 2차원 평면 위에 하나의 표로 정리하기에 좋아()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축적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데이터를 쌓다 보면 벽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산미], [-산미]라는 기준으로 베이스와 톱을 나누고 [+바디], [-바디]라는 기준으로 베이스1과 베이스2, 톱A와 톱B를 나누는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방법론에 있습니다. 이 틀에 따라 블렌딩을 진행하다 보면 그 결과물의 산미는 중간 수준으로 획일화되고 바디는 3단계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게 됩니다. 그 이상의 미묘함을 추구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두 종류의 원두를 반씩 섞는 방법으로는 내가 원하던..
'반반커피 프로젝트'를 처음 글로 쓰면서 저는 커피를 산미의 유무에 따라 베이스와 톱으로, 바디의 유무에 따라 베이스와 톱을 각각 1/2, A/B로 분류하여 1A, 1B, 2A, 2B의 네 가지 접근법을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각 분류에 잘 들어맞는 가장 전형적인 커피를 나열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겁니다. 베이스1 [-산미][+바디] : 인도네시아 베이스2 [-산미][-바디] : 브라질, 콜롬비아 등 톱A [+산미][+바디] : 케냐 톱B [+산미][-바디] : 에티오피아(습식), 파나마 등 실제로 마셔본 결과 몇몇 커피는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A의 톱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파푸아뉴기니는 생각보다 산미가 강하지 않았고 B의 톱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예멘이나 에티오피아 건식 역시 생각보다 산미가 강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