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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대 성능비는 상당히 간단하고 직관적인 기준입니다. 제품의 가격과 성능을 알면 가성비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용편익분석이라도 하려면 기회비용과 소비자잉여를 알아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수고로운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큰 돈을 움직이는 사업에서는 보통 수고로운 게 아닌 비용편익분석이 자주 쓰입니다. 가격대 성능비에는 없고 비용편익분석에는 있는 '그 무엇'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가격대 성능비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가격대 성능비(이하 가성비)는 제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쓰일 수는 있어도 제품 구입의 타당성이나 구입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쓰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가성비라는 기준이 무엇을 놓친다기보다는, 가성비라는 기준을 잘못 적용함으로써 무언가를 놓치게 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핸드밀 A는 5만 원이고 성능은 50입니다. 고급 핸드밀 B는 10만 원이고 성능은 65입니다. 전동 그라인더 C는 20만 원이고 성능은 80입니다. 란실리오 록키는 60만 원이고 성능은 100입니다. 이 제품 중 가성비가 높은 것은 당연히 핸드밀 A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에스프레소 머신 미스 실비아를 한 대 운영하는 상황이라면 란실리오 록키를 한 대 들여놓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가성비가 가장 높은 핸드밀 A를 열두 대 들여놓는 게 나을까요? 당연히 록키를 한 대 들여놓는 게 낫습니다. 가성비 높은 핸드밀이나 그라인더를 여러 대 들여놓는다고 분쇄의 질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성비는 한계효용의 체감[각주:1]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핸드밀 A를 가진 상황에서 고급 핸드밀 B를 들여놓는다면 핸드밀 A는 사실상 쓸모가 없어지는데, 이 때의 한계효용은 (B의 효용-A의 효용)이 됩니다. B를 구입하면서 돈은 10만 원을 냈지만 추가로 얻은 효용은 B-A만큼밖에 안 되는 것이죠. 핸드밀 A, B를 가진 상황에서 전동 그라인더를 들여놓는다면 핸드밀 A, B는 사실상 쓸모가 없어지는데, 이 때의 한계효용은 (C의 효용-B의 효용)[각주:2]이 됩니다. C를 구입하면서 20만 원을 냈지만 추가로 얻은 효용은 C-B만큼밖에 안 됩니다.


 도구나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때, 남은 선택지 중에서 가성비가 가장 높은 것을 고르다 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방에' 그라인더 C를 구입했다면 20만 원을 지출하고 C만큼의 효용을 누렸을 텐데, A-B-C순으로 업그레이드하니 35만 원을 지출하고 C-B만큼의 효용만 누리게 된 것이죠.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경험이나 학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여러 단계를 거쳐 온 수업료는 이만큼 쓰디 씁니다.




 저는 '살 물건은 언젠가 사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방에 가기'를 조건부로 지지합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한다면 한 방에 가는 편이 오히려 좋을 때가 많으니까요.


 - 오래 쓸 게 확실하다면.

 -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 중 가장 저렴한 축에 든다면.


 문제는 내가 한 방에 가고 싶어하는 물건이 저 조건을 만족하는지 판단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 구입하고 나서 오래 쓴 다음 되돌아보는 것이란 점이겠지요. 오래 쓸 거라 확신하고 구입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찬장 신세를 진다거나, 쓰다 보니 내가 산 거 말고 다른 게 더 좋은 거였네 싶은 일이 심심찮게 발생합니다.


 지혜롭고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물건을 사기 전에 꽤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어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구입하고 오래 쓴 다음 되돌아보며 후회를 좀 해 봐야 그만한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만(…), 유추와 같은 비연역적 추리 방법을 사용하면 적은 수의 실수로도 많은 지혜와 통찰을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저 냄비가 왜 찬장 신세를 지게 되었는지를 곱씹다 보면, 앞으로 살 전기 주전자가 찬장 신세를 지게 될 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힌트가 나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전기 주전자를 잘못 사고 후회한 경험이 없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유추의 힘입니다.


 가성비를 이야기하다 글이 참 멀리도 왔네요.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자면—값싸고 괜찮은 물건을 찾아내는 것보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확신이 선다면 한 방에 가는 것도 좋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르세요. 과소비는 악덕이지만, 현명한 소비는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주


  1. 앞서 말한, 가성비라는 기준을 잘못 적용함으로써 놓치는 그 무엇 중 하나가 바로 이 한계효용의 체감이라 할 수 있지요. [본문으로]
  2. C의 효용-(B의 효용-A의 효용)-A의 효용. 괄호를 풀면 A의 효용 두 개는 상쇄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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