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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커피 원두 보관 방법을 탐구한 끝에 찾아낸 상온 보관법과 냉동 보관법을 열 달 가까이 사용했습니다. 보관 방법에 변화를 줄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요. 이 정도면 안정화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정리하는 글을 올립니다. 예전에 쓴 글은 탐구에 초점을 둔 탓에 좀 어수선해 보여서, 깔끔하게 다듬고 가지를 쳐내고 싶었고요.




 1. 로스팅 후 7일 내외라면, 상온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두의 상온 보관 기간은 로스팅 후 5일~10일의 범위 내에서 줄여 잡거나 늘려 잡을 수 있습니다. '구입 후 N일'이 아닌 '로스팅 후 N일'임에 유의하세요. 로스터리에서 구입한 원두나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배송받은 원두가 오늘 볶은 원두가 아닌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원두를 엊그제 볶았다면, '로스팅 후 7일'은 닷새 뒤가 됩니다. ('로스팅 후 N일'을 계산할 때는 초일을 산입하지 않습니다)


 원두를 상온 보관할 때는 비닐백[각주:1]에 넣은 다음 묶거나 집게로 집어 공기를 통하지 않게 처리하고, 그 비닐백을 다시 보르미올리 피도 같은 밀폐용기에 담아 보관합니다. 원두를 '비닐백에 싸서' 밀폐용기에 넣는 이유는 향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각주:2]. 제가 쓰는 방법이고, 많은 로스터리 카페에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며칠 안에 소비할 만큼만 원두를 구입해서 그때그때 마셔 버리는 것이 최고의 원두 보관 방법입니다. 그 며칠 동안 원두를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상온 보관이고요. 여기에 이견을 제시할 커피 전문가는 거의 없을 겁니다. 로스팅한 원두를 상온에 보관하는 로스터리 카페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냉장 보관하거나 냉동 보관한다는 로스터리 카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며칠마다 로스터리에 찾아갈 시간이 없거나, 매번 인터넷 주문할 때마다 내야 하는 배송료가 싫거나[각주:10], 큰 포장의 원두가 더 값싸거나—한 번에 많은 원두를 사야 하는 경우, 다음의 냉동 보관을 고려할 만합니다.




 2. 일주일 이상 보관해야 한다면, 냉동 보관을 고려할 만합니다.


 원두를 냉동 보관할 때는 글라스락 직사각 4호 같은 작은 밀폐용기에 원두를 소분해 담아 냉동실에 넣습니다. 이렇게 보관한 원두를 해동할 때는 밀폐용기 뚜껑을 열지 않은 채 상온에 몇 시간 이상 내놓아 원두의 온도가 상온의 온도와 같아지도록 한 다음, 꺼내 쓰는 것이죠.


 저는 한 번에 300~500g정도의 원두를 구입해 100g정도는 상온 보관을 하고 나머지 200~400g은 냉동실로 보냅니다. 이렇게 냉동 보관된 원두는 2~4주에 걸쳐 마시게 되는데, 맛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향에도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각주:11]




 냉동 보관법에 의문을 품는 분도 있을 겁니다. 예상되는 의문(혹은 질문)에 제 나름대로 답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원두를 냉동 보관하면 맛없어지지 않을까?


 혹시 냉동 보관한 고기·과일·채소가 맛없게 느껴져서 원두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라면, 원두는 고기·과일·채소와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원두의 수분 함유량은 매우 낮기 때문에 냉동을 하는 과정에서 물기가 얼어 조직이 파괴되는 정도가 고기·과일·채소에 비해 훨씬 덜합니다. 게다가 원두는 '국물'을 내어 마시는 식재료이지, 조직을 씹어먹는 식재료가 아닙니다. 국물 재료인 멸치나 새우를 냉동 보관하는 경우는 흔하죠? 냉동 보관한 멸치나 새우로 우린 국물이 맛이 없던가요? 아니죠? 그럼 냉동 보관한 원두로 우린 국물(=커피)이 맛이 없을까요? 아닐 겁니다.




 2) 냉장 보관이 냉동 보관보다 낫지 않을까?


 원두를 냉동 보관하는 것이 냉장 보관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원두의 '신선도'를 따지자면, 휘발 성분(volatile compounds)이 많이 남아있는 원두, 오일의 산패가 덜 진행된 원두가 더 신선한 원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휘발 성분이 늦게 날아가고 오일이 늦게 산패되는 환경이 냉장실일까요? 냉동실일까요? 그럼 냉동실에 보관한 원두가 더 신선할까요, 아니면 냉장실에 보관한 원두가 더 신선할까요? 당연히 냉동실 쪽이겠지요.




 3) 밀폐용기에 소분해 담아 넣는 이유는 무엇인가?

   뚜껑을 열지 않은 채 해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두의 표면에 물기가 맺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수적으로, 차가운 원두가 바깥의 덥고 습한 공기에 노출되는 횟수도 줄일 수 있습니다. 표면에 물기가 맺히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덜 상하겠지요)


 큼직한 밀폐용기에 원두를 잔뜩 넣어 두었다가 그때그때 꺼내 쓰면, 뚜껑을 열 때마다 차가운 원두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힙니다. 냉동실에 넣으면 맺힌 물방울은 얼고, 다음 번 뚜껑을 열때 얼음 위에 다시 물방울이 맺히고… 냉동실을 들락날락하다 보면 원두에 달라붙는 얼음의 양도 그만큼 많아지겠지요.


 이렇게 얼음이 달라붙고 물기가 맺힌 원두를 그라인더에 곧바로 넣을 수는 없습니다. 말려서 물기를 날려보내야 하지요. 물기를 날려보낼 때 향도 같이 날아갑니다. 물기를 말리려면 공기가 어느 정도는 통해야 하니, 공기의 흐름을 타고 휘발 성분도 빠져나갈 테니까요.


 소분해 담아 넣은 원두를 꺼내서 뚜껑을 열지 않은 채 해동하면, 이렇게 물기를 날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원두를 공기에 노출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고, 향을 보존할 수 있지요.




 4) 해동해서 갈기 귀찮은데, 원두를 분쇄한 다음 냉동 보관하는 건 어떨까?


 글라스락 같은 밀폐용기에 원두를 넣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원두의 향 성분(특히 휘발 성분)은 밀폐용기의 고무패킹 쯤은 쉽게 뚫고 나옵니다(상온 보관할 때 원두를 비닐백에 싸서 밀폐용기에 넣는 건 이 때문이죠). 밀폐용기에 분쇄된 원두를 넣으면? 홀빈을 넣었을 때보다 훨씬 강한 향이 납니다. 더 빠르게 향이 달아나고 있는 거죠. 냉동실에서 휘발 성분의 움직임이 줄어들더라도, 분쇄된 원두가 홀빈보다 빠르게 향을 잃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두를 냉동 보관할 때 홀빈(whole bean) 상태로 보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죠.


 분쇄한 원두를 냉동 보관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충족할 때에 한하여 고려할 만합니다.


 ① 1회분씩 소분할 것.[각주:12]

 ② 비닐백에 싸서 밀폐용기에 넣을 것.[각주:13]

 ③ 커피를 추출할 때, 원두 가루의 온도를 감안할 것.[각주:14]




 원두를 냉동 보관하면 한 번에 두세 종류의 원두를 사서 번갈아 마실 수 있습니다. 상온에는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를 냉동실로 보내면 되니까요. 제가 원두를 상온에만 보관한다면 100g씩 구입해서 1주일이고 열흘이고 한 가지 종류의 원두만 소비해야 합니다. 좀 지루합니다. 냉동 보관을 하더라도 한 번에 두세 종류의 원두를 마시는 편이 재미가 있지요. 구성이 좋은 2종 세트나 3종 세트가 나왔을 때 사 먹기도 좋고요. 그래서 저는 냉동 보관을 선호합니다. 스페셜티고 COE고 블루마운틴이고 망설임 없이 냉동실로 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각주


  1. '환경호르몬 없는 플라스틱 소재'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PE(LDPE 또는 HDPE) 같은 재질로 만든 신선식품용 위생 비닐백이 좋습니다. PVC로 만든 '비닐봉다리' 말고요. [본문으로]
  2. "밀폐용기에 원두를 그냥 담아두면 향이 날아가는데, 이렇게 비닐백에 싸서 밀폐용기에 넣으면 향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직원의 말이었습니다. ('커피 원두 보관 방법을 탐구하다') [본문으로]
  3. 강대영·민승경 지음, (2012) <한국의 커피 로스터> 서울꼬뮨. pp.22-203. [본문으로]
  4. '1일'로 응답한 곳이 1곳. '3일' 1곳, '4일' 1곳. 초일불산입이므로, 여기에서의 '1일'은 '로스팅 후 24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문으로]
  5. '7일~14일'로 응답한 곳이 1곳, 볶음도에 따라 다르지만 '1일~2달'(?!)로 응답한 곳이 1곳이었습니다. [본문으로]
  6. 19곳 중 16곳이 5일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보관할 수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본문으로]
  7. 19곳 중 8곳이 9일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보관할 수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본문으로]
  8. 19곳 중 6곳이 10일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보관할 수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본문으로]
  9. 19곳 중 12곳이 7일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보관할 수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본문으로]
  10. 무료배송 상품이 있지만… 보통 배송비가 상품 가격에 반영됩니다. 원두 가격 7500원+배송비 2500원인 제품을, 10000원 내고 사면서 무료배송 받는 꼴이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무료배송 상품은 많이 살 수록 손해거든요. (7500원짜리 원두를 두 개 사면 15000원이고 여기에 배송비가 2500원 붙으면 17500원인데, 10000원짜리 무료배송 원두를 두 개 사면 20000원을 내야 합니다) [본문으로]
  11. 가끔 오래 보관한 원두의 향이 조금 약해진 것 아닌가 싶을 때는 있었지만, 문제삼을 정도로 향이 감소한 것이 확연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고, 향의 감소가 실험으로 증명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의심이 들어도 그냥 기분 탓인가보다 하고 넘어가곤 합니다. [본문으로]
  12. 해동을 생략하고 뚜껑을 열면 분쇄된 원두의 표면에 물기가 맺히는데, 이 상태로 상온에 보관하는 건 좀 곤란합니다. 물기를 말리고 나서 보관하자니 향이 (홀빈보다 훨씬 빠르게) 달아날 테고, 안 말리고 보관하자니 찝찝하고… [본문으로]
  13. 작은 빵을 싸는 비닐백과, 아주 작은 크기의 밀폐용기 등을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본문으로]
  14. 물의 온도 1~2도도 중요한 변수가 되고, 원두 가루를 많이 넣는 드립 커피나 프렌치프레스라면 특히 신경써야 합니다. 물의 온도를 평소보다 조금 높게 잡거나, 예열한 도자기 드리퍼를 사용하거나, 뜸들이기를 할 때 물을 조금 더 붓는 식으로 보정을 가해야겠지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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