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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봄에 하리오 드립서버를 구입한 이후 정말 오랜만에 지른 커피 도구입니다.


 유리 약탕기로 추출한 커피를 빨리 식힐 때 예전에는 드립서버와 눈이 가는 체로 추출하는 프렌치프레스의 변법으로 650mL, 티포트 브루 커피로 350mL를 추출해서 1L를 만들어 썼습니다. 집에 있는 하리오 드립서버와 티포트의 용량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프렌치프레스의 변법은 파보일드 커피보다 산미의 표현이 좋지 않았고 터키시 커피와 비교하면 바디의 표현이 좋지 않다는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당시의 도구로 1L를 생산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을 뿐,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었죠. (파보일드로 400mL, 티포트 브루 커피로 350mL를 추출해 섞는 방법도 있었지만, 글라스락 직사각 4호에 들어가는 원두 50g을 한 번에 쓰기에는 1L쯤 생산하는 쪽이 나아서 이렇게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1L를 한 번에 생산하는 도구를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후보는 1.2L짜리 티포트와 1.7L짜리 밀크포트였죠. 새 원두가 들어오면 이런저런 추출법을 시도하며 추출법에 따라 달라지는 맛을 즐기는 기간이 있는데, 터키시 커피나 파보일드 커피가 마음에 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티포트보다는 밀크포트를 골라 파보일드 커피를 끓이는 게 낫겠다 싶어, 밀크포트 쪽을 눈여겨 보게 되었습니다. (가정용 가스렌지의 화력으로 터키시 커피를 1L씩 끓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터키시 커피는 선택지에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 1.5L를 80~90초 만에 끓이는 중화요리용 고화력 버너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커피 끓이겠다고 이런 가스렌지를 집에 설치할 용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밀크포트, 혹은 밀크포트 형태로 생긴 키가 큰 냄비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긴 자루가 달린 편수냄비는 보관할 때 공간을 너무 잡아먹어서,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형태의 손잡이 달린 냄비를 찾게 되었습니다. 쿡에버 14cm 멀티팟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겠다 싶었고 그 외에도 멀티팟, 밀크팟이라는 이름이 붙은 냄비들이 몇 가지 있어서, 매장을 한 번 둘러보고 결정하기로 했죠.




 법랑 주방용품은 블로그질을 할 때 폼나는 사진을 올릴 수 있고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했을 때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어 좋습니다. 금속 표면에 유리 혹은 자기 소재를 씌운 것이므로 금속의 높은 열전도율과 유리 혹은 자기의 낮은 반응성이라는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어서 좋고요. 하지만 단점도 모두 따라왔다는 게 문제입니다. 코팅이 깨지면 내부의 금속이 녹슬기 시작하고 제품 수명도 끝이 납니다. 그래서 모시고 살아야 하죠.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티타늄처럼 녹슬지 않는 금속 표면에 에나멜을 씌우면 녹 걱정을 안 해도 될 텐데, 시들지 않는 꽃은 생화(生花)가 아니듯 부서지고 녹슬지 않는 법랑은 법랑이 아닌 건지(…)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티타늄으로 만든 법랑 제품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알루미늄, 구리, 법랑 주방용품을 꺼립니다. 관리하기 까다롭거든요. 그나마 알루미늄이나 구리는 통삼중(혹은 통5중, 기타 통N+1중) 구조로 만들어 겉에 스테인리스 스틸을 씌우면 관리가 편해지지만, 법랑은 통3중 구조의 겉면이 연약한 재질로 되어 있는 탓에 무조건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모시고 사는 난이도도 가장 높습니다. 급가열·급냉각도 안 되고, 금속제 숟가락이나 쇠수세미 같은 것으로 표면을 긁어도 안 됩니다(뭔가 휘저으려면 나무 숟가락이나 실리콘 주걱 같은 걸 써야 합니다). 살짝 떨어뜨리거나 부딪는 충격에도 코팅이 깨질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고, 건조할 때 물빠짐을 좋게 하려고 기울여 세워 놓았다가 크게 넘어져도 망가질 수 있으니 건조대에 세울 때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법랑 위에 뭔가가 넘어져도 충격이 가니 주변에 그릇 세울 때도 조심해야 하고요.


 그래서 평소에는 법랑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만, 리스 에델바이스 저그의 예쁜 모습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리스 에델바이스 저그는 파보일드 커피를 대량생산하는 용도로 쓰기에 좋습니다. 1L씩 생산할 수 있어 좋고, 내부 표면이 금속이 아니기 때문에 커피의 유기산과 반응할 리 없으니 맛에 미치는 영향을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구리 냄비보다는 설거지하기가 좀 편합니다. 겉모습이 참 예뻐서 볼 때마다 흡족한 점은 보너스죠. 그래봐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커피 1L를 생산하기 위해 50g의 원두를 분쇄해서 밥공기에 받으면 그릇의 80%정도가 차오릅니다. 파보일드 커피를 끓이려면 뜸들이기를 한 원두를 끓는 물에 투입해야 하는데, 원두 가루가 80%정도 차 있는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커피빵이 정말 빵빵하게 부풀어오릅니다. 간신히 넘치지 않는 정도죠. 뜸들이기를 생략한 파보일드 커피에도 도전해 보았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밥공기에서 뜸을 들인 커피를 옮겨붓는 기술을 연마하기로 했습니다.


 리스 에델바이스 저그로 대량생산한 다음 식힌 파보일드 커피는, 하리오 드립서버로 끓여서 식힌 파보일드 커피와 비교했을 때 산미가 조금 적고, aroma를 좀 더 잘 잡아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거나 유사한 추출법을 사용하더라도 1회 생산량이 달라지면 여러 가지 변수들이 달라지고(가열할 때 물의 온도가 변하는 속도가 다르다거나, 사소한 손놀림 차이로 인해 추출 시간 등에 차이가 생기거나…) 그 결과로 맛이나 향이 달라질 수 있나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도구가 달라지는 데에서 오는 차이는, 추출법이 달라지는 데에서 오는 차이에 비해 작다고 할 만합니다. 결과물의 뉘앙스가 조금 달라지더라도, 어디까지나 파보일드 커피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저그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다가, 림(rim)의 안쪽에 파인 듯한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구입처에 들고 가 물어보니, 이렇게 칠이 파여나간(혹은 칠이 벗겨지거나 깨진) 듯한 자국은 제조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자국이라고 합니다. 손으로 만드는 제품이라 어쩔 수 없다는군요. (직원에게 정확한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코팅을 말리는 과정에서 어딘가에 걸어놓는 동안 눌려서 생기는 것인가 봅니다) 매장에 디스플레이된 다른 제품의 림 안쪽에도 유사한 자국이 있더군요. 납득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파여나간 곳에서 녹이 나는 건 아니냐고 물어보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답하더군요. 리스(Riess)에서 만든 법랑은 녹이 잘 안 스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그리고 파여나간 자국과는 별개로, (설거지를 하고) 림에 물이 맺힌 채로 방치하면 테두리 부분에 녹이 조금씩 생길 수는 있는데 그럴 때는 철수세미 등으로 녹이 난 테두리 바깥쪽만 조금 갈아내고 기름을 발라두면 된다는 도움말도 듣고 왔습니다.


 여러분의 리스 에델바이스 저그에 패인 자국이 있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정상이라고 하니까요. 직원에게 너무 쉽게 설득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기분 탓이겠죠? 물기를 잘 닦아주면서 정성껏 관리하면 오래 가겠지요. 생긴 것도 예쁘고, 커피 맛도 마음에 들고, 한 번에 1L씩이나 생산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니까, 오래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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