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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 : 과테말라 COE 2014 2위 El Injerto (Guatemala COE 2014 #2 El Injerto) 235g

 구입일 : 2015. 1. 27.

 구입처 : 그린어쓰 커피


 저의 쉰 번째 커피는 과테말라 COE 2014 2위 엘 인헤르토였습니다.


 이 원두의 COE Score는 90.08점입니다.



 2013년도 엘 인헤르토 COE 경매분을 일본 회사가 따 가는 바람에 2013-2014년에는 이 농장의 COE 커피를 한국에서 맛볼 방법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다행히 2014년도에는 과테말라 COE에서 2위를 한 El Injerto I - 14 경매분을 한국 회사가 따냈습니다. 그린어쓰 커피에 엘 인헤르토 COE가 올라온 것을 확인한 저는 다른 원두에 대한 관심을 일단 접어두고, 집에 남은 원두가 소진되기를 기다려 이번 주문을 넣게 되었습니다. 작년 9월 쿠아모스에서 엘 인헤르토를 맛본 적은 있지만, COE에서 입상한 엘 인헤르토를 구입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COE 커피답게 결점두는 거의 없었습니다. 조가비 모양의 콩(shell)과 기형/미성숙 콩이 몇 개 있었을 뿐, 그 외의 심각한 결점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두 봉투를 개봉했을 때 볶은 깨처럼 고소한 향이 방안에 퍼졌는데, 향기가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비주얼, 압도적인 향,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결점두… 핸드 소트 작업 단계에서 저는 이미 이 원두에게 져 버렸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요? 추출한 커피는 핸드 소트를 할 때의 그 원두만큼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맛과 산미가 생각보다 평이했거든요. 물론 좋은 특성들은 있었습니다. 다크초콜릿의 느낌과 우유 같은 바디감이 마음에 들었고, 자극적인 쓴맛이나 탄내가 없어 아주 부드럽고 고급스러웠습니다. 조금은 브라질 같은 고소함과 약간의 스모키함이 맛에 개성을 부여해 주었고, 뒷맛이 무척 달콤하고 오래 지속되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와인의 느낌이 조금 있고, 바디는 가벼운 편입니다.


 터키시 커피로 추출한 엘 인헤르토는 sweetness와 balance에 높은 점수를 줄 만했지만 산미가 인상적이지 않아 좀 밋밋한 느낌이었습니다.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하여도 산미는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바디는 더 가벼워지지만, 바디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 사이에는 균형이 잘 잡힌 편이었습니다. 티포트 브루 커피로 추출하면 쌉쌀한 맛과 복합적인 맛과 스모키함이 부각되어 한결 에스닉하고 풍성한 느낌이 납니다.


 다크초콜릿과 산미의 대비가 매우 독특한 커피입니다. 보통 커피가 뜨거울 때는 다크초콜릿 같은 특성이 우세를 점하고, 커피가 적당한 온도로 진입하면 산미가 올라오면서 다크초콜릿을 누르게 마련입니다. 적당한 온도에서 다크초콜릿과 산미가 동시에 감지되며 둘이 대비를 이루는 건 꽤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번 엘 인헤르토의 산미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신맛 나는 다크초콜릿이라는 산미를 "○○○ 닮았다" 규정하려면 대체 어떤 과일이나 식품을 끌어와야 할 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핸드 소트를 합시다>에 언급했던 '커피 생활의 모든 장면을 즐기는 것'이 생각납니다. 엘 인헤르토는 향기롭고 기분 좋은 커피입니다. 원두 봉투를 개봉했을 때의 향기, 핸드 소트를 할 때 방 안에 퍼졌던 향기, 펼쳐 말린 원두 가루를 모을 때의 향기,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설거지를 할 때 입 안에 남은 달콤함과 향기로움… '한 잔의 커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엘 인헤르토의 매력들이지요.




 COE 커핑 점수 90점을 넘긴 COE 커피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설적인 농장의 전설적인 커피를 맛본다는 건 커피 애호가의 큰 기쁨이고, 의미있는 경험입니다. '잡맛' 없는 깔끔함, 대단히 좋은 향기, 달콤하고 기분좋은 뒷맛, 다크초콜릿과 산미의 대비는 이만한 수준의 커피에나 기대할 만한 좋은 특성일 겁니다. 하지만 각각의 특성이 아주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커피의 맛과 향은 '커피 맛', '커피 향'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약("커피는 왜 '커피 맛', '커피 향'밖에는 낼 수 없는가?")으로 기능할 수도, 하나의 미적 형식("'커피 맛', '커피 향'이라는 범위 안에서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으로 기능할 수도 있습니다.


 커피라는 미적 형식에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한 잔의 커피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보게 될 수도 있겠지요. 언젠가는요. 음, 그런데 COE 커핑 점수 90점 가지고는 좀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94점쯤 된다면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올해는 그런 고득점 커피를 한국 회사가 따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커피가 한국에 들어오기를 기다려서든, 그런 커피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든, 한 번쯤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COE 커피든 스페셜티 커피든, 객관적인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커피는 커피 애호가로서는 커피 리뷰어로서든 가끔씩(혹은, 자주) 맛볼 가치가 있습니다. 높은 품질을 기대할 만하고, 안정적인 맛을 내어주고, 맛의 기준이 되어주니까요. 한동안 그리웠던 "잘 닦인 길"을 달릴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이제 다시 여행을 떠날 시간이고, 다음 길은 비포장도로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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