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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심은 흔한 커피입니다. 네스카페 수프리모 크레마가 없는 가게, 칸타타 노뜨가 없는 가게, 강글리오가 없는 매장은 있어도 맥심이 없는 매장은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흔합니다. 한국의 커피믹스 시장, 나아가 한국의 커피 시장을 꽉 잡고 있는 게 맥심이고요. 반 잔의 물에 진하게 탄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는 한 끼의 식사를 마무리하는 커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식당을 나서기 전, 종이컵에 담아 스틱봉지로 휘저어 마시는 맥심은 서민 커피문화의 꽃이죠. 그러한 향유 맥락 때문에 스노브들에게 낮잡히는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식당에서는 맥심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다, 집에서 타 먹는 맥심은 그 맛이 나지 않다 보니 저는 지금까지 맥심을 산 적이 없었습니다. 프리미엄 스틱커피를 여럿 리뷰하면서도 맥심을 살 생각은 한 적이 없네요. 그러다 얼마 전 맥심 아라비카 100 스틱을 발견했고, 한 번쯤 맛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동서식품은 맥심 아라비카 100이 카누보다 비싼 상품으로 자리잡는 것을 원하지 않은 모양인지, 20스틱이 들어간 제품을 3400원이라는 가격에 팔고 있었습니다. 가격을 본 저는 '카누보다는 맛이 좀 덜하지만, 가격 대비 괜찮은 품질'의 커피를 기대했는데—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맥심 아라비카 100 스틱커피는 카누보다 싸지 않습니다. 스틱당 중량이 카누(일반 사이즈)의 절반이거든요. 맥심 아라비카 100 20스틱에 들어 있는 커피의 양은 18g으로 카누 10스틱에 들어 있는 커피의 양과 같고, 단위중량 당 가격은 프리미엄 스틱커피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맥심 아라비카 100을 싸게 즐기려면 스틱커피가 아닌 병커피 버전을 사야 합니다)


 그리고 맛도 카누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스틱 하나(0.9g)에 물 100mL를 타면, 아주 좋은 맛의 커피가 나옵니다.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를 물에 탈 때와 같은 달콤구수한 향이 올라오고, 적당한 온도에 진입하면 산미도 올라오며, 감칠맛 비슷한 복합미도 감지됩니다. 기분좋은 달콤한 뒷맛이 입안에 오래 남습니다. 인스턴트 커피로서는 이례적이며, 원두커피 중에서도 쉽게 접하기 어려운 특성입니다. 카누보다 낫다 못하다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맥심 아라비카 100은 마일드 커피로서는 최고 수준의 제품입니다.


 포장에는 "맥심 블랙커피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 : 일반 커피믹스보다 물의 양을 40%정도 더 넣어 즐겨보세요. (140mL)", "맥심 아라비카 100 스틱 1개를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적당량(140mL) 부어 완전히 용해한 후 음용하십시오."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지만, 그리 믿을 게 못 됩니다. 인스턴트 커피(커피믹스가 아닌, 커피만 들어 있는 인스턴트 커피) 0.9g을 물 140mL에 타면 너무 묽거든요. 테라로사 라이브러리의 <커피와 TDS, 농도>라는 글에 의하면 미국인은(SCAA) TDS 1.15-1.35%의 커피를 선호하고 유럽인은(SCAE) TDS 1.2-1.45%의 커피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인스턴트 커피 0.9g을 140mL의 물에 타면 그 TDS는 0.64%로 전술한 농도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고, 인스턴트 커피 0.9g을 100mL의 물에 타면 그 TDS는 0.9%로 전술한 농도에 그럭저럭 근접함을 알 수 있습니다. SCAA나 SCAE가 커피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제품 포장에 적힌 '스틱 1개(0.9g)에 물 140mL'는 너무 멀리 나갔습니다. 연한 커피에도 정도라는 게 있지요. 스틱당 1.2~1.4g씩 넣어 주고 140mL의 물을 부으라고 했으면 이런 타박은 듣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제 생각에 맥심 아라비카 100 스틱커피의 적정 농도는 반 잔의 물(90~100mL)에 스틱 1개, 한 잔의 물(180~200mL)에 스틱 2개 정도인 것 같습니다.


 맥심 아라비카 100, 커피빈 아메리카노 스틱커피, 카페티모르 피스 아메리카노는 모두 자극성이 적고, 진하게 탔을 때 좋은 특성을 보입니다. 맥심 아라비카 100은 뒷맛이 달다는 점에 강점이 있고, 커피빈 아메리카노 스틱커피는 맛과 향의 디테일이 좀 더 좋고, 카페티모르 피스 아메리카노는 바디감이 좀 더 강하다는 강점[각주:1]을 각각 가집니다. 마일드 커피로서는 셋 다 훌륭하지요.


 맥심 아라비카 100은 여러모로 저의 상상을 뛰어넘은 커피였습니다. 한 가지 더 저의 상상을 뛰어넘은 건, 맥심이 우리나라 상표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맥심 아라비카 100의 포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Maxim은 몬델리즈 인터내셔널 그룹의 상표이며 라이선스 하에 사용됩니다."


 맥심은 외국 상표입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상표권 사용료로 크래프트푸드 홀딩스에 낸 돈만 1595억원이죠. 여기에 1999-2014년 배당금 7578억 5000만원[각주:2], 1999-2008년 기술료 349억원을 합치면 9523억원에 달합니다. 어마어마한 액수죠.


 참고로 2000년부터 2013년까지 14년 동안 스타벅스가 미국 본사로 보낸 로열티가 1140억원, 배당금이 65억원[각주:3]입니다. 합치면 1205억원이죠. 동서식품이 2014년 한 해에 미국 크래프트푸즈에 보낸 1381억원(배당금+로열티)보다도 적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크래프트 푸드는 지난 15년간 배당금(7578억 5000만원)과 기술료(349억원), 상표권 사용료(1595억원) 등으로 총 9523억원을 동서식품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커피 브랜드 '맥심'(Maxim)으로 유명한 동서식품이 지난해 미국계 식품기업 크래프트 푸드(Kraft Foods)에 배당금과 로열티 명목으로 1381억원을 지급했다.


 감사보고서가 처음 공개되던 1999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기술료는 총 349억원으로 집계됐다. … 2008년부터는 상표권 사용계약을 맺고 있다. … 2009년 222억원에서 지난해 261억원까지 7년간 총 1595억원이 상표권 사용료로 지급됐다.


<한국에서 15년 마신 '맥심 커피믹스', 미국에 9523억 '송금'> 2015-04-01 10:20 [기사 링크]

안준형 기자 why@bizwatch.co.kr


 19일 업계에 따르면, 스타벅스코리아는 2013년 미국 본사에 로열티 241억원을 지급했다. 2012년(163억원)보다 48% 가량 증가했다. … 지난 2000년 이후 누적 로열티가 114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배당금은 별도다. 스타벅스코리아는 2005년 처음으로 60억원의 배당을 실시한 뒤, 4차례에 걸쳐 총 130억원을 배당했다. 스타벅스코리아의 지분 절반을 가진 미국 본사는 이중 65억원을 챙겼다.


<스타벅스 로열티 1140억원… 아메리카노 한잔당 얼마?> 2014-06-19 10:44 [기사 링크]

안준형 기자 why@bizwatch.co.kr


 삼성이나 현대가 미국 시장에서 재미를 보고 있는 마당에 크래프트푸드가 한국 시장에서 재미를 보면 안 될 이유 따윈 없겠죠. 하지만 지극히 한국적이고 서민적인 커피로 알려진 맥심이 사실은 외국 상표라는 사실, 스타벅스나 커피빈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많은 돈을 한국에서 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메이저 언론에 의해 제대로 알려진 적이 (제가 알기로는) 없다는 점은… 좀 슬프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기사 올리면 광고 끊길 게 뻔하니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겠죠.




 맥심 아라비카 100은 수준급의 제품입니다. 기술[각주:4]과 원재료[각주:5] 측면에서 흠 잡을 데가 없고, 이만한 규모로 사업을 벌이면서 이 정도의 맛과 가격[각주:6]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맥심 아라비카 100의 품질이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반대쪽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업규모가 비교적 작은 커피빈 아메리카노 스틱커피[각주:7]나 카페티모르 피스 아메리카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뜻을 품고 노력을 기울인다면 따라잡고 앞지를 수 있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프리미엄 스틱커피 시장을 잡고 있는 카누와 루카는 맛으로 승부할 생각이 없는 건지[각주:8][각주:9] 보온병 전쟁에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카누 아메리카노 70스틱 포장에 이중벽 단열 구조의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묶어 파는 것이 꽤나 파격적인 프로모션이었는데, 요즘은 원터치 보온병과 Alfi 닮은 보온병이 정면승부를 벌이고 있습니다.[각주:10]


 맥심 아라비카 100을 마셔본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좀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좀 더 열린 생각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맥심 계열 인스턴트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저는 이제 다음 커피를 찾아 떠날 생각입니다. 앞으로는 미분이 들어가지 않은 인스턴트도 가리지 않고 맛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각주


  1. 스틱당 중량이 1.6g으로 셋 중 가장 많고, 커피 미분까지 들어 있습니다. 품질이 뒷받침되는 상황이라면, 물량 앞에 장사 없는 법이죠. [본문으로]
  2. 크래프트푸드 홀딩스는 동서 지분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간 동서 배당금 1조 5157억원의 절반을 가져간 셈이죠. [본문으로]
  3. 총 배당금 130억원 중 절반인 65억원을 미국 본사가 가져갔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4. 맥심 아라비카 100에 탄맛, 탄내, 쓴맛, 떫은 맛 따위가 없는 것으로 보아, 로스팅이나 추출 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5. 본사인 크래프트푸드는 좋은 원두의 확보에 많은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6. 맥심 아라비카 100 병커피는 g당 75원 수준의 가격입니다. 이 가격 그대로 스틱으로 왔다면, 10스틱 18g에 1350원도 가능했을 겁니다. 현실은 20스틱 18g에 3400원이지만… [본문으로]
  7. 커피빈 아메리카노 스틱커피는 (주)희창유업 제2공장에서 제조됩니다. (미국에서 제조되어 물 건너 오는 게 아닙니다) [본문으로]
  8. 아니면 '쓴맛 나는 검은 물'에 가까운 커피 체인점의 아메리카노에 자사 제품의 맛을 맞추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9. 2014년 크리스마스에 나왔던 카누 크리스마스 한정판은 맛이 좋아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난 뒤에 새로운 라인으로 출시되기를 기대했지만('카누 마일드' 같은 맛으로 말이죠)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많이 아쉬웠죠. [본문으로]
  10. 이쯤 되면 10스틱 포장을 사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70스틱/100스틱 포장이 딱히 비싼 것도 아닌데 거기에 보온병이 붙어나온다면, 회사가 그 보온병 값을 무엇으로 충당하겠습니까? 10스틱 포장 판매수익을 끌어다 쓰겠지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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