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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보일드 커피의 최종적인 목표는 적당한 수준의 TDS를 유지하면서 향미의 경향을 과소추출 쪽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TDS는 커피의 농도와 관련이 있고 과소추출/적정추출/과다추출은 추출된 향미의 구성(프로파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과다추출이 되면 영혼 없는 쓴맛과 잡맛까지 우러나오고, 과소추출이 되면 쓴맛과 잡맛과 바디감이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산미가 부각됩니다. 과소추출이 되면서 TDS까지 낮으면 맹탕이 되는데, 맹탕이 되는 상황을 면하면서(=적당한 수준의 TDS를 유지하면서) 쓴맛과 잡맛을 줄이고 산미를 살려내는(=향미의 경향을 과소추출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파보일드 커피의 묘미입니다.


 향미의 경향을 과소추출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밸런스를 파괴하는 추출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보일드로 추출한 결과가 산뜻하고 재미있어서 성공적일 때도 있고,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서 그리 좋지 않게 끝날 수도 있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예상이 가능합니다.


 A. 결과가 좋을 것으로 예상됨

  1) 내 취향을 벗어난 강배전이다→파보일드로 추출하면 쓴맛과 탄내를 줄일 수 있다.

  2) 채프가 탔다→파보일드로 추출하면 쓴맛과 탄내를 줄일 수 있다.

  3) 콤콤하고 구릿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파보일드로 추출하면 해당 특성이 덜 드러난다.

  4) 지금보다 좀 더 깔끔했으면 좋겠다→파보일드로 추출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5) 지금보다 산미가 좀 더 강했으면 좋겠다→파보일드로 추출하면 산미가 강해진다.


 B. 나쁠 것으로 예상됨

  1) 내 취향을 벗어난 약배전이다→파보일드로 추출하면 취향을 더 벗어나게 될 것이다. (바디↓쓴맛↓산미↑)

  2) 산미가 너무 강하다→파보일드로 추출하면 산미가 더 강조된다.

  3) 구수하고 콤콤한 게 좋은데→파보일드로 추출하면 해당 특성이 덜 드러난다.

  4) 다크초콜릿 같은 바디가 매력적인데→파보일드로 추출하면 해당 특성이 덜 드러난다.

  5) 지금도 바디가 너무 약해서 별로인데→파보일드로 추출하면 바디가 더 가벼워진다.


 바디도 약하고 산미도 약한 경우(A5와 B5에 모두 해당되는 경우)에는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법을 바꾸는 것보다는, 기존의 추출법을 사용하면서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원두를 투입하여 TDS만 높이는 편이 좋습니다.


 다크초콜릿 같은 바디가 매력적인데 산미가 약해서 아쉬운 경우(A5와 B4)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원두를 투입하여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하면 TDS를 높여 바디를 강화하면서 산미도 살려내는 식의 추출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다크초콜릿 같은 바디가 매력적인데 깔끔함이 부족한 경우에는 하나를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터키시로 가서 바디를 취하거나, 파보일드로 가서 깔끔함을 취하거나, 아예 티포트로 가서 에스닉함을 취하거나…


 파보일드 커피는 채프가 타기 쉬운 브라질이나 콤콤하고 구릿하기 쉬운 에티오피아 건식을 구원할 때가 많습니다. 결이 좋지만 강도가 약한 산미를 강화하고 싶을 때, 원두의 맑음을 취하고 싶을 때에도 유용합니다. 가끔 예상을 뒤집은 결과를 내어 주기도 하고요. (바디감과 에스닉함이 강점인 인도네시아를, 얼큰하고 깔끔한 커피로 만들어 준다거나요)


 파보일드 커피는 맛을 선택하고 연출하는 재미가 있는 추출법이고, 가끔씩 의외의 결과가 나오는 추출법이기도 합니다. 손이 많이 가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추출법—터키시 커피, 파보일드 커피, 티포트 브루 커피—에 들어있는 이유도 이것이고요. 여러분도 한 번 커피를 데치는 재미에 빠져 보시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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