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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 :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 (Honduras La Huerta) 200g

 구입일 : 2016. 5. 16.

 구입처 : 카페 드 벤 (딴지마켓을 통하여 구입)


 저의 여든두 번째 커피는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였습니다.



 서울커피엑스포에 가기 전, 이른바 우선 구매 대상(주요 산지 중 맛본 지 오래된 산지의 목록)을 뽑았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올 생각이었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철회해야겠습니다. 리스트에 들어 있던 나라들 중 케냐콜롬비아 원두는 커피엑스포 현장에서 단짝이 사 주었고, 과테말라, 르완다, 브라질, 엘살바도르, 인도네시아, 탄자니아, 파나마, 파푸아뉴기니 정도가 남았습니다.


 다음 원두를 어디서 주문할까 고민하다가, 새로운 로스터리를 개척해 보기로 했습니다. 딴지마켓에 입점한 카페 드 벤에서 상당히 희소한 온두라스 원두(COE가 아니면서 이름난 농장에서 생산된 원두는, 직거래 지향의 로스터리에 이따금 올라오는 정도입니다)를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로 던져 넣었습니다.




<참고 : 이 블로그의 별점과 그래프>


 중간 바디, 다크초콜릿(촉감/맛/향), 청량감 있는 쌉쌀함(맛), 삼나무·후추(향), 정향·고수(향), 민트·장뇌(향), 볶은 보리·귀리(향), 견과류의 고소함(향), 화이트와인을 닮은 가볍고 새콤한 풀냄새(향), 트러플 오일(향), 루이보스(향)


 지독히도 훌륭한 오락성, 이라는 측면에서 망설임 없이 별 일곱을 줄 만한 책으로 <병신 같지만 멋지게>가 있습니다. 호란 씨가 번역을 했죠. 주인공 아버지의 걸쭉한 입담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온갖 욕을 푸지게 갖다 붙여보며[각주:1]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여신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고백은 저의 가슴살과 안심살을 통과해 염통 깊쑤키[각주:2] 박혔습니다. 미미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도 예의바른 변호사의 정중한 전화가 두려워 리뷰를 작성하며 표현을 고치고 또 고치는 저에게 입심 좋은 흑형의 찰진[각주:3] 영어 칼럼이 주어진다면 번역이라는 명분 하에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며 한 주 포스팅을 날로 먹을 수 있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행운은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았고, 소재를 찾아 마우스 커서를 굴리던 중에 딴지마켓에서 팔리는 원두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미국 흑인 영어는 물 건너갔고, 논설우원 문체로 리뷰를 한 번 써 볼까?' 그렇게 수단과 목적은 전도되었고, 저는 이곳에서 원두를 주문하게 되었습니다.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는 대충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뭔지는 잘 모르겠는, CNN에 나온 미국 국무위원 같은 농장입니다. 물론 농장이 이 정도 인지도를 얻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독자 제위께서는 복숭아를 좋아하십니까? 복숭아를 좋아한다면 '햇사레' 같은 브랜드를 알고 계실 겁니다. 물이 많고 단맛이 강한 복숭아를 좋아한다면 미백이니 천중도니 하는 품종 이름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 혹시 장호원에 있는 복숭아 과수원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는 쪽에 너부리 편집장의 왼쪽 불알을 걸겠습니다. (오른쪽 불알은 하도 이놈저놈이 걸어대서, 지금쯤 누가 따 갔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과수원도 이 정도인데, 뉴스에 나올 일도 별로 없는 지구 반대편 나라의 커피 농장 이름을 대충 들어본 것 같다? 엄지 두 개 따봉으로는 부족한 미라클입니다.


 이 농장의 생두는 카페 드 벤 유종규 로스터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바리스타 챔피언십에 참가할 카페 드 벤 식구를 위한 비장의 무기로 말이죠. 하지만 딴지마켓 담당자에게 발각당했으며, 유종규 로스터는 눈물을 머금고… 아 쓰바, 참으로 감동적인 스토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입선 드리겠습니다) 커피가 맛이 없다면 나 말고 유종규 로스터의 목을 치라는, 나라 빚 공기업에 떠넘기듯 스무스하게 책임을 토스하는 딴지마켓 담당자의 센스에 검지[각주:4] 두 개 모도아 똥꼬 깁쑤키 존경의 뜻을 보내는 바입니다. (그리고 사인값이 -1이 나올 때까지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시계방향으루다가)



 이 원두는 Medium+로 로스팅되었다고 합니다. 미디엄-하이-시티…로 진행되는 단계의 미디엄+입니다(미디엄과 하이 사이라는 의미에서 '미디엄~하이'라 표기할 수도 있습니다). <시티 로스트는 중배전인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커피 생활을 하는 동안 구입하는, 에스프레소용이 아닌 원두의 로스팅 정도는 사실상 5개 단계—미디엄, 하이, 시티, 풀시티, 프렌치의 범위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미디엄+ 정도는 무난히 약배전으로 분류됩니다.


 약배전한 중미 원두. 견과류처럼 고소하고, 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며, 산미가 좋고 바디가 가벼운 마일드 커피를 기대하게 만드는 정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맛을 보니 의외의 노트가 잔뜩 나왔습니다. 다크초콜릿의 느낌, 그와 연합한 쌉쌀함, 삼나무와 후추 같은 스파이시(spicy)한 노트가 이끄는 얼큰함… 저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라나다카페의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블루마운틴이 하이+ 정도로 로스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쓴맛이 강하고 산미가 약한—중강배전한 인도네시아 커피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듯이,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 또한 미디엄+ 로스팅되었지만 중강배전한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에 기대할 만한 특성 여러 가지를 선보였습니다. 로스팅 포인트가 원두에 부여하는 성향 내지 한계를 뛰어넘는, '생두의 승리'로 기록될 만한 커피를 이렇게 가끔씩 만나게 됩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를 마실 때면 '내가 아까 양치를 하고 입 안을 덜 헹궜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치약의 화한 느낌이 나기 때문이죠. 향이 약한 치약으로 양치를 하고, 입 안을 충분히 헹구고 1시간쯤 기다린 다음 커피를 마셔도 치약 느낌이 났습니다. 입 안에 치약이 남아서가 아니라 커피 안에 민트류의 노트가 들어 있어서 치약 느낌이 났던 겁니다. 이렇게 민트류의 존재감이 뚜렷한 커피는 처음입니다. 민트 혼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민트·장뇌·정향이 연합하여 화하고 알싸한 느낌과 제법 강한 향을 냅니다.


 아이스크림, 음료, 차·커피와 같은 디저트의 세계에서 민트만큼 선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특성도 흔치 않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싫어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치약 맛 나는 걸 왜 돈 주고 사 먹느냐'는 말을 듣는 쪽에 속해 있습니다. 저에게는, 커피에 포함된 민트류의 향미는 청량감을 보태는 색다른 노트입니다. 싫어하는 분께는 확 깨는 노트가 되겠지요(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의 쓴맛은 청량감 있는 쓴맛입니다. 일단 쓴맛 자체의 질이 좋은 편입니다. 풀비린내가 없고, 탄내나 탄맛이 없어 깔끔합니다. <잘 된 강배전, 기분 좋은 쌉쌀함>에서 언급된, 클로로겐산류의 쌉쌀함이 아마 이런 것이겠지요.[각주:5] 여기에 삼나무와 후추의 얼큰함과 민트류의 알싸함이 더해져 상큼하고 톡 쏘는 청량감이 나온 듯합니다.


 다크초콜릿의 표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난하고 전형적이며 품질이 높은 특성들(핫초코 비슷한 바디감, 카카오 비슷한 쌉쌀한 냄새, 다크초콜릿의 쌉쌀한 맛)과 스파이시의 표준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삼나무·후추의 얼큰함은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를 표준적인—그러니까 블렌드 없이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의 재료로 써도 좋을 만한 원두로 만들어 줍니다. 다만 이러한 특성들이 중강배전이 아닌 Medium+라는 약배전에서 나타났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외이고,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민트류의 알싸함이 이 원두를 상당히 비범한 커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산미의 양감은 적습니다. 커피가 따뜻할 때에는 별 존재감이 없다가, 커피가 적당한 온도를 지나 조금 미지근해지면 갑자기 올라옵니다. 마지막 모금에서 혀의 양 옆을 집는 듯한(nippy) 산미의 습격을 받으면 이게 내가 조금 전까지 마시던 그 커피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각주:6] 과일의 이미지는 없었습니다. (화이트와인을 닮은 가볍고 새콤한 풀냄새는 드라이 아로마dry aroma 상태에서 감지되었습니다. 추출된 커피에서는 화이트와인이나 포도의 이미지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볶은 보리·귀리의 고소함, 견과류의 기름진 맛과 향, 호박엿 비슷한 달착지근함[각주:7], 베트남 쌀국수 비슷한 구수함과 약간의 쿠리함, 트러플 오일·루이보스 같은 조금은 색다른 특성이 번갈아 나타나므로 그 맛과 향이 상당히 역동적입니다(다크초콜릿, 삼나무·후추, 민트류는 바탕에 항상 깔려 있습니다).


 수율이 비교적 높은 티포트 브루 커피에서는 민트류의 알싸함이 특히 강하게 나타났고, 쌉쌀한 맛, 다크초콜릿, 향신료 같은 복합적인 특성도 비교적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수율이 비교적 낮은 파보일드 커피에서는 민트류의 알싸함이 덜 나타났고 감칠맛과 고소함이 두드러졌습니다. 터키시 커피는 둘의 중간쯤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파보일드 커피를 대량생산해 식히면 쌉쌀하고, 무척 고소하고, 산미도 제법 있는 커피가 됩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시원하게 내린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를 한번 맛보시기 바랍니다. (아이스 드립도 좋고, 콜드 브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블로그의 별점과 그래프>에서, 객관적인 분석이 아닌 개인적인 선호를 바탕으로 별점을 매기기로 결정하였음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별점은 저의 선호만을 반영하기 때문에, 똑같은 별 넷(★★★★)도 어느 원두에 가서 붙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와이 코나에 달린 별 넷은 그 명성에 비해 실망스러운 하이 커머셜이란 뜻이고 쿠아모스의 엘 나랑호에 붙은 별 넷은 '아주 좋은' 마일드 커피란 뜻이 됩니다. 시티로 볶은 과테말라 원두에 별 넷이 붙는 건 특별한 사건이 될 수 없겠지만 풀시티 후반으로 볶은 인도네시아 원두에 별 넷이 붙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저의 취향을 뛰어넘은, 로스터리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되겠지요. 별점 그 자체는 저의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지만, 글을 읽는 여러분이 저의 취향과 선호를 파악하고서 이 별점이 의미하는 바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객관적인 자료가 될 겁니다.


 로스터리의 단독 승리로 기록하기에는 좀 애매하지만, 생두와 로스터리의 공동 승리로는 해줄 만한 원두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원두를 리뷰하며 산미가 적고 묵직한 원두에 별 넷을 주는 건 별점을 매기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르완다 루붐부 스페셜티가 저의 예순한 번째 커피였으니, 스물한 번만에(그리고 대략 열 달 만에) 나온 첫 기록입니다.


 인도네시아 블루 플로레스를 리뷰하면서 저는 "산미, 쓴맛, 복합적인 맛 세 가지가 커피의 맛을 정립(鼎立)"한다고 생각하며 "산미 없는 커피는 저에게는 발 하나가 없는 솥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커피의 산미를 좋아하고, 산미가 인상적이지 않은 커피를 마실 때 허전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는 산미 없이도[각주:8] 커피의 맛을 완성했습니다. 청량감 있는 쌉쌀함과 다크초콜릿의 특성, 디테일을 완성하는 노트들은 제4의 길—신맛 나는 약배전 커피, 쓴맛 나는 강배전 커피, 이도저도 아닌 커피 외(外)의—이 존재하며, 이 길을 걸어서 꽤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온두라스 라 우에르타는 상당히 묘한 위치에 서 있는 커피입니다. 산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필하기에는 산미가 약한 편입니다. 산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어필하기에는 낮은 온도에서 올라오는 산미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어중간한 산미도 괜찮다고 보아 주는 사람의 상당수는 민트류의 특성 때문에 등을 돌릴 겁니다. 쓴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라 우에르타의 쓴맛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고, 이른바 스타벅스식 강배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라 우에르타의 쓴맛이 인상적이지 않을 겁니다. 누구든지 좋아할 만한 커피인 동시에 누구든지 싫어할 수 있는 커피이고, 모든 곳에 속해 있지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커피—선문답만큼이나 난해하지만, 마셔 보면 깨달음이 올 것도 같은 커피입니다. 민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한 번쯤 맛볼 만한 커피입니다. 리뷰를 보고 구매했는데 맛이 없다면, 저 말고 유종규 로스터의 목을 치시기 바랍니다. (똥침은 사양하겠습니다)



★★★★


"청량감 있는 쌉쌀함이 매력적인, 다크초콜릿을 닮은 커피."




 각주


  1. "'이런 개좆같은 새끼'가 나아, 아니면 '이런 미친 씨발새끼'가 나아?" 같은 질문을 친구들에게 던지며 올바른 번역(?)을 고민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울컥 치밀어 오를 때에도 SNS에 '포도'나 '뻐꾹' 따위의 단어를 욕 대신 사용했다는 분이… 덕분에 몸 속 사리가 30%쯤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2. 올바른 표기는 '깊숙이', 올바른 발음은 [깁쑤기]입니다만, 규범 따원 개의치 않는 딴지정신을 존중하야 '깊쑤키'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3. 2015년 12월 14일에 '차지다'와 같은 뜻을 가진 표준어로 '찰지다'가 추가되었습니다. 역시 찰지다가 차지다보다 더 찰지죠. 마음 놓고 올바른 표현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졸라~ [본문으로]
  4. 올바른 표현은 '집게손가락' 또는 '인지'. [본문으로]
  5. 커피의 쓴맛을 이루는 두 가지 그룹의 물질은 클로로겐산류와 비닐카테콜 중합체입니다. 로스팅 초기에는 클로로겐산류가 생성되고, 로스팅이 더 진행되면 클로로겐산류는 퀸산과 카페산으로 분해되며, 카페산이 다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 비닐카테콜 중합체가 생성됩니다. 미디엄+ 정도의 약배전 커피에서 쓴맛이 난다면, 많이 생성된 클로로겐산류가 퀸산과 카페산으로 분해되기 전에 로스팅을 마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6. 저는 그래프를 그리며 이 원두의 산미를 下로 분류했습니다. 이는 커피가 따뜻할 때 산미가 별 존재감이 없고 양감이 부족했다는 점에 무게를 두고 내린 결정입니다. [본문으로]
  7. 터키시 커피로 추출하여 조금 식은 상태에서 마셨을 때 딱 한 번 느꼈습니다. 다시 감지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상단의 노트에는 적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단맛(sweetness)의 양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원두의 단맛은 下로 분류되었습니다. [본문으로]
  8. 문장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산미 없이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산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커피가 따뜻할 때에는 별 존재감이 없고 양감도 부족하지만, 커피가 적당한 온도를 지나 조금 미지근해지면 혀의 양 옆을 집는 듯한(nippy) 산미가 갑자기 올라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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