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페의 메뉴판은 보통 에스프레소로 시작합니다. 에스프레소가 배리에이션 커피의 심장(心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두 번째 줄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아메리카노, 카페 라테, 달달한 커피, 달달한 음료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매장의 FW시즌 카테고리 별 음료 판매량

(단위 : unit, 1유닛이 몇 잔인지는 비밀!)


 매장에서 일하며 놀랄 일은 많았지만, 그중 블로그에 적어도 될 만한 것을 꼽으라면 사람들이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테를 정말 많이 주문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에게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카페 라테는 굳이 돈 주고 사 마실 필요가 없는 제품이었거든요.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카페 라테를 주문하는 사람의 안목이나 취향을 깎아내릴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집에서 아메리카노 비슷한 음료나 아이스 카페 라테 비슷한 음료를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기에, 밖에서 커피를 돈 주고 사 마실 때 집에서 만들기 힘든 에스프레소나 따뜻한 카페 라테를 주문하는 것이죠. 에스프레소나 따뜻한 카페 라테는 원두의 품질과 바리스타의 실력이 많이 반영되는 메뉴이기 때문에 커피 맛을 평가하기에 좋은 메뉴이기도 해서, 카페를 리뷰하는 상황에서도 이 둘을 주로 주문하게 됩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아이스 카페 라테를 주문해 보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는 에스프레소가 맛이 없고, 그렇다고 멀리 나가기는 귀찮고, 따뜻한 카페 라테는 얼른 마시고 일어나기 힘드니 아이스를 주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이스 라테는 식후에 호로록호로록 빠르게 마시기에 좋았고, 오전 내내 타들어가던 속을 편안하게 달래 주었습니다. 땀 흘리고 나서 마시는 맥주가 꿀맛이듯이, 태움당하다 마시는 아이스 라테는 저에게 신이 내린 선물과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카페의 모든 메뉴를 고객의 입장에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상업성을 중시하는 카페는 아메리카노를 메뉴판의 맨 윗줄에 놓고, 에스프레소를 저 아래에 놓거나 아예 메뉴판에서 빼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적어내려가자면 각각 A4 용지 한 장 분량은 나올 만큼, 에스프레소에 대한 의전은 (이 업계에서는 나름대로) 민감한 사안입니다.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고품질의 원두, 숙련된 바리스타, 좋은 기기, 세팅을 잡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파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장사가 안 되는 카페는 앞의 셋을 갖추기 어렵고, 장사가 정말 잘 되는 카페는 뒤의 하나를 갖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손님들이 줄을 섰는데 세팅 잡겠다고 음료 제조를 몇 분 멈춘다는 건, 심정지 환자를 앞에 두고 AED 설명서를 읽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팔 수 있는 바리스타는, 물론 실력자이지만, 좋은 여건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 셈입니다.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에스프레소는 수많은 타협의 결과물입니다. 타협 과정에서 쉽게 희생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에스프레소를 그 자체로 즐길 때의 향미입니다. 이를테면 '에스프레소는 자극적이지만 카페 라테를 만들면 괜찮은' 블렌드가 있고 우리 가게에서 라테가 잘 팔린다면, 라테를 만들었을 때 맛이 좋은 세팅을 잡고 에스프레소는 어느 정도 포기하는 식입니다.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며, 에스프레소가 커피의 심장이라 믿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소식은 더더욱 아닙니다.




 카페에서 많이 팔리는 메뉴는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테입니다. 바리스타 학원 강사에게서도 들을 수 있고, POS기를 하루만 잡아도 깨달을 수 있고,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슬쩍 운만 띄워도 다들 끄덕거리는 걸 볼 수 있을 정도의, 업계 상식에 가까운 통설입니다. 브랜드와 고객의 성향, 입지 조건과 매장의 컨셉 등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잔 수를 기준으로 따졌을 때 절반 이상의 매출이 아메리카노(hot/iced)와 카페 라테(hot/iced)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커피가 맛있는 집'으로 소문나려면 아메리카노나 카페 라테 중 하나는 확실히 괜찮아야 합니다. 에스프레소가 유별나게 맛있어 봐야, 그 메뉴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코스 요리가 맛있다고 소문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고 "그냥 평범한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에스프레소가 맛있다고 소문난 집에서 아이스 카페 라테를 마시고 특별한 장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팅이 정상적으로 잡혀 있다면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카페 라테는 망칠 수가 없습니다. 따뜻한 카페 라테에는 바리스타의 역량이 조금 반영되겠지만, 어지간히 소질이 없는 바리스타도 3개월이나 6개월 정도 노력하면 수준급의 스티밍과 푸어링이 가능해집니다. 상당히 빠르게 상향평준화가 되는 셈이죠. 이 한계를 돌파하여 탁월한 품질로 승부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가게의 커피가 정말 마음에 들더라도 점심시간에 15분을 더 걸어가야 한다면, 휴일에 한 시간을 더 이동해야 한다면 방문을 포기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거든요.


 음료의 품질이 모든 것을 뒤집을 정도로 결정적이지 않다면, 속도와 정확성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 시간에 ○○만 원(때로는 ○○○만 원)의 주문을 해치우면서 메뉴가 뒤바뀌지 않고 주문이 누락되지 않으며 음료 품질로 컴플레인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오케이인, "짱깨"와 별 다를 게 없는—아니, 사실은 짱깨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집에는 요리부가 있지만, 카페 음료는 본질적으로 모두 식사부거든요. 2만 원짜리 드립 커피라면 무난히 요리부로 넣어줄 수 있겠지만, 한 잔에 2만 원은커녕 <커피 한 잔에 1만 원>도 뉴스의 제목이 될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는 '요리부 커피'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그 존재 자체도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입니다—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심장입니다. (에스프레소를 'heart of coffee'나 'コーヒーの心臓'로 서술하는 문장이 잘 검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표현은 한국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메리카노, 카페 라테, 그 외의 배리에이션 커피는 에스프레소를 품고 있기에 '커피'로 인정받습니다. 이 점에서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본질인 셈이고, 이러한 에스프레소를 기준으로 카페의 커피 맛을 평가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현장이 돌아가는 방식이 위와 같으니,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테로 충분한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고객 반응도 괜찮은 카페에 찾아가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인 리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한 교조적 평가, 카페 고객의 입맛과는 동떨어진 평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글이 참 멀리도 왔네요. 모든 사람이 에스프레소를 즐겨야 할 필요는 없으며,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테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바리스타로서 일하며, 리뷰어로서 커피나 카페를 리뷰할 때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할 지를 고민하며 글을 쓰다 보니 엉뚱한 뉘앙스를 풍기게 된 것 같기는 합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고 사람들의 취향을 외면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