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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원두 이야기

반반커피 프로젝트 [1]

느린악장 2013. 10. 10. 10:12

 예전에 인도네시아 만델링을 마실 때, 실수로 탄자니아 AA를 조금 섞은 적이 있습니다. 신맛이 살짝 비치는 쌉쌀한 커피가 되어 무척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처음으로 블렌딩의 가치와 이점을 진지하게 인정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다양한 산지의 커피를 스트레이트로 마셔보자는 목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블렌딩이 된 커피를 사서 마시는 것은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됩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끝에, 저는 '반반커피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두 종류의 커피를 사서 각각 스트레이트로도 마셔 보고, 블렌딩해서도 마셔 보기로 말입니다.


 반반씩 섞는 블렌딩이라면 커피의 맛과 향을 결정하는 주도적인 원두(편의상 '톱'으로 칭하겠습니다)와, 이 원두의 맛과 향을 뒷받침하는 원두(편의상 '베이스'로 칭하겠습니다)로 역할을 나누어보는 편이 블렌딩의 접근법을 체계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각주:1]




 저는 베이스 쪽에서 먼저 접근해 보았습니다. 고전적인 블렌딩인 모카 자바 블렌드[각주:2]는 자바를 베이스로 하는 블렌딩입니다. 자바는 바디감이 좋고 쌉쌀하지만 산미가 약한 원두입니다. 모카 자바 블렌드는 자바의 바디감으로 모카의 날카로운 산미를 눌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편의상 이런 원두를 베이스로 하는 블렌딩을 1번 접근법으로 부르겠습니다. 1번 접근법의 베이스로는 자바, 만델링, 인도 몬순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블렌딩에 많이 쓰이는 원두로 브라질과 콜롬비아를 빼 놓을 수 없지요. 맛과 향이 크게 튀지 않는 원두들입니다. 다른 원두의 날카로운 특성을 부드럽게 감싸준다고 할 수 있지요. 편의상 이런 원두를 베이스로 하는 블렌딩을 2번 접근법으로 부르겠습니다. 2번 접근법의 베이스로는 브라질, 콜롬비아, 멕시코, 페루, 동티모르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니카라과, 도미니카, 엘살바도르 등은 좀 애매하지만, 2번 접근법에 변형을 주고 싶을 때 베이스로 쓸 수 있을 겁니다.




 톱은 산미가 강한 커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이스는 대체로 산미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죠. 산미가 강한 원두의 하나로 케냐를 들 수 있습니다. 편의상 이런 원두를 톱으로 하는 접근법에 A라는 접미사를 붙이겠습니다. 콜롬비아를 베이스로 하고 케냐를 톱으로 하는 원두는 2A 접근법이 되겠군요. A의 톱으로는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짐바브웨 등 "케냐 류 커피"[각주:3]와 파푸아뉴기니[각주:4]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산미와 바디감이 강하다는 특성을 공유합니다.


 산미가 인상적인 원두로 예멘과 에티오피아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편의상 이런 원두를 톱으로 하는 접근법에 B라는 접미사를 붙이겠습니다. 자바를 베이스로 하고 예멘 모카를 톱으로 하는 원두는 2B 접근법이 되겠습니다. B의 톱으로는 에티오피아, 예멘과 르완다[각주:5], 호주 스카이베리[각주:6]는 좀 애매하지만, B 접근법에 변형을 주고 싶을 때 톱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반반커피 프로젝트에 의한 블렌딩에는 1A, 1B, 2A, 2B의 네 가지 접근법이 존재합니다.[각주:7] 접근법은 네 가지지만, 같은 계열의 다른 원두로 바꾸면(1번 접근법의 베이스끼리 바꾼다거나, B에 속하는 톱끼리 바꾼다거나…) 맛과 향의 결이 바뀌기 때문에 다른 블렌딩이 됩니다.[각주:8] 심지어 원두의 산지가 같아도 가공 방식[각주:9]이나 로스팅 정도에 따라서[각주:10]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블렌딩의 결과가 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접근법'은 블렌딩 결과를 예언한다기보다, 블렌딩의 목표와 방향을 잡아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A 접근법은 강한 바디감으로 산미를 살짝 눌러준 힘센 커피를 지향하고, 1B 접근법은 다소 강한 바디감으로 산미를 눌러준—비교적 강한 쪽에서 밸런스를 잡는 커피를 지향할 겁니다. 2A 접근법은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강한 산미와 바디를 감싼—비교적 부드러운 쪽에서 밸런스를 잡는 커피를 지향하고, 2B 접근법은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강한 산미와 풍성한 향을 감싼 온유한 커피를 지향할 겁니다.


 전에 마셔본 탄자니아+만델링은 1A 접근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지금 마시고 있는 케냐+멕시코는 2A 접근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접근법을 시도하며 맛 좋은 반반커피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구입한 원두의 목록이 쌓이면서 조금씩 꾀가 나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재미있겠군요.




 각주


  1. 톱과 베이스는 향수를 조합할 때 쓰이는 '톱 노트', '베이스 노트'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입니다. 블렌딩과 조향은 원리가 다르지만, 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여서 그대로 따왔습니다. [본문으로]
  2. 반반씩 섞는 블렌딩은 아닙니다. 모카 1 : 자바 2의 비율로 섞는다는군요. [본문으로]
  3. "인디커피교과서" pp.266-269, 요약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 파푸아 뉴기니의 커피 가운데 일부 고급 커피는 에티오피아 커피와 케냐 커피의 중간에 위치하며 블렌딩을 할 때 힘 있는 신맛, 복합적인 향미, 레몬의 풍미를 더할 수 있다. ("인디커피교과서" pp.266-269, 요약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 크기가 작은 부르봉종은 향이 풍부하고 맑은 향미가 있으며 고품질 커피에서는 체리 같은 향미가 나는 게 에티오피아의 워시드 커피와 비슷하다. ("커피 교과서" pp.156-197, 요약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6. 특히 스카이베리는 향이 풍부하고 초콜릿 맛이 나는 훌륭한 커피로 풍부한 신맛을 자랑한다. 그러나 바디는 튼튼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인디커피교과서" pp.137-147, 요약본에서 재인용)[/footnote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케냐 계열에 비해 상대적으로 바디감이 약해서, 산미가 도드라지기 때문에 다소 날카롭다는 인상을 줍니다. 파나마[footnote]보쿠테(Boquete)와 플로렌티나(Florentina)같은 커피는 아주 좋은 신맛과 충실함을 갖춘 훌륭한 향미를 잔에 담아 낸다. ("인디커피교과서" pp.115-136, 요약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과테말라와 코스타리카는 이러한 4분법 프레임에 끼워맞추기 애매해서, 일단 뺐습니다. 그렇다고 이 원두들이 블렌딩하기에 나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톱과 베이스의 특징에 의한 4분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블렌딩에서는 충분히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두들입니다. [본문으로]
  8. 모카+자바와 이르가체페+몬순은 같은 2B 접근법이지만, 둘의 맛과 향은 꽤 차이가 나겠지요. [본문으로]
  9. 에티오피아 시다모는 건식과 습식으로 모두 가공될 수 있습니다. 건식 시다모는 상대적으로 하라에 가까울 것이고 습식 시다모는 상대적으로 이르가체페에 가깝겠지요. [본문으로]
  10. 스트레이트 음용을 전제로 한 케냐는, 과도한 신맛을 잡기 위해 강하게 로스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강배전을 하면 상대적으로 산미가 줄고 바디가 강해지겠지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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