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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반커피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겸, 글을 한 편 쓰고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음식을 만들면서 깨달은 평범한 진리는 "좋은 재료를 쓰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고기와 좋은 간장을 쓰면 쇠고기+간장+마늘+백세주+표고버섯·다시마 육수 정도의 간단한 레시피로도 맛있고 깔끔한 불고기를 만들 수 있지요.[각주:1]


 한 잔의 커피를 추출하는 과정도 요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두를 쓰면 좋은 원두(볶은 원두)를 만들기 쉽고, 좋은 원두(볶은 원두)를 쓰면 맛있는 커피를 추출하기 쉽지요. 블루마운틴 커피의 맛과 향을 재현하기에 가장 좋은 원두는 블루마운틴입니다. 이것저것 섞어 봐야 블루마운틴 비슷한 물건이 나올 수는 있어도 블루마운틴과 정확히 같은 물건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겠지요. 내가 어떤 스타일의 커피를 원하느냐. 어떤 스타일의 커피가 내 입에 맞느냐… 이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커피 산지 순례이고 반반커피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쿠바 크리스털마운틴의 특성을 변별자질(distinctive feature)로 분석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을 겁니다.


 [+결이 부드러운 산미][+달콤한 뒷맛][+고소한 향][+다크초콜릿 향][-강한 쓴맛][-강한 바디감]


 저는 위와 같은 특성을 가진 원두를 터키시 커피로 끓여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그 원두가 반드시 크리스털마운틴일 필요는 없고, 또 정확하게 위와 같은 특성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야기를 더 풀어가기 전에 다음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만두를 튀겨 먹자."


 위 문장의 정확한 발음은 [만두를 튀겨 먹짜]입니다. [만두]를 [맨두]로 발음하거나 [튀겨]를 [티겨]로 발음한다고 해서 의사소통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발음의 정확도를 떠나서, [만두]와 [맨두]가 같은 음식이고, [튀김]과 [티김]이 같은 요리법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만두]를 [만주]로 발음한다면? '델리만쥬'와 같은 상품명으로 팔리는, 과자 만쥬[각주:2]를 튀겨먹자는 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맥락이 주어지면 '아, 만두를 잘못 발음했구나'하고 알아들을 수도 있겠지만, 맥락이 없으면 정말 과자를 튀길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제가 쿠바 크리스털마운틴의 특성을 참고하여 블렌딩을 할 때, 무엇이 [만두]와 [맨두]의 차이고 무엇이 [만두]와 [만주]의 차이인지를 생각하면서 블렌딩을 해야, 크리스털마운틴 100%라는 최고의 정답을 내버려두고 "크리스털마운틴 커피의 맛과 향을 재현하겠다"며 엉뚱한 데에서 헤매는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털마운틴이 아닌 다른 커피를 이것저것 섞어 봐야 크리스털마운틴과 정확히 같은 물건이 나올 수가 없는데, 어디부터는 포기할 수 있고 어디까지는 포기할 수 없는지, 즉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를 정하는 편이 낫지요.


 저는 [+달콤한 뒷맛] 정도는 상황에 따라 포기할 수 있고, [+감칠맛]과 [-감칠맛]은 둘 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만두]와 [맨두]입니다. 하지만 [+결이 부드러운 산미], [+고소한 향], [+다크초콜릿 향], [-강한 쓴맛], [-강한 바디감]은 모두 가져가고 싶습니다. [만두]가 [만주]가 되지 않으려면(혹은 [만주]보다 더 동떨어진 발음이 되지 않으려면) 앞서 말한 네 가지 자질은 모두 재현해야 할 겁니다.




 커피의 맛과 향은 대단히 복잡미묘합니다. 변별 자질에 의한 특성 분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이르가체페와 타라주의 [+고소한 향]은 그 결이 다르고, 치아파스와 크리스털마운틴의 [+다크초콜릿 향]은 그 강도가 다릅니다. 이러한 한계는 직접(그리고 끊임없이) 커피를 추출해 마셔보면서 경험과 감각으로 넘어서야 합니다.


 제가 반반커피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섞는 원두를 두 종류로 제한한 이유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원두가 섞였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알기 쉬워서였습니다. 요리를 할 때 재료가 여러 가지 들어가면 어느 재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어렵듯이, 블렌딩을 할 때 원두가 여러 가지 들어가면 어느 원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어렵지요. 결과물을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하려면[각주:3] 두 종류를 섞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가장 편합니다.


 섞는 원두를 두 종류로 제한한 또 다른 이유는 2차원 평면 위에 표로 만들어 정리하려면 변인이 두 가지를 넘지 않는 게 좋아서입니다. 변인이 세 가지라면 제3변인이 달라질 때마다 표를 하나씩 늘려 가는 편법을 쓰거나, 3차원 입체의 투시도 같은 걸 만들어 정리할 수밖에 없지요. 만들기도 힘들고 보기도 힘들고 유지보수하기도 까다롭습니다. 아예 본격적으로 커핑을 하여 자질을 점수화한 다음 중다회귀나 요인분석을 돌리는 수도 있겠지만… 블렌딩 하다가 박사논문 쓸 기세 변인을 둘로 제한하고 표로 만드는 게 자료정리하기에는 쉽고 깔끔해요.


 원두 비율을 반반으로 정한 이유도 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의 표로 만들어 정리하기 편해서입니다. 비율이 달라진다면 별도의 표를 만들거나 3차원 입체의 투시도를 만드는 수고가 들어가지요. 위 문장과 비슷한 이유네요.


 원두 비율을 반반으로 정한 또 다른 이유는 저의 편견이나 판단착오 때문에 엉뚱한 비율로 섞어놓고 '에이, 이 맛이 아니잖아' 하는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반반으로 섞어서 맛을 보고, 데이터를 축적하고, 나중에 '이러이러한 맛과 향을 내려면 어느 원두를 더 넣고 어느 원두를 덜 넣는 쪽이 좋겠어' 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일이 쉬워지지요.




 최종적으로는 3종이나 그보다 많은 종류의 원두를 각각 다른 비율로 섞는 블렌딩에 도전하게 될 겁니다. 반반커피 프로젝트는, 그 최종 단계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멕시코+과테말라 반반을 마시고 '부드럽고 고급스럽지만 산미가 약하니, 에티오피아 하라나 예멘 모카와 같이 산미가 강하고 좀 쏘는 특성을 가진 원두를 섞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더 그럴싸한 커피를 원하는 저의 욕심엔 끝이 없나 봅니다.




 각주


  1. '이게 어딜 봐서 간단한 레시피야…'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전형적인 불고기 레시피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파, 고추, 후추, 요리당, 그 외 몇 가지 재료들이 빠져 있습니다. [본문으로]
  2. 구개음인 'ㅈ, ㅊ' 뒤에서는 단모음과 이중모음이 구별되지 않고 주와 쥬는 모두 [주]로 발음됩니다. [본문으로]
  3. 이 경우에는 A라는 원두와 B라는 원두를 섞었을 때, 각각의 원두가 갖는 변별 자질이 어떻게 드러나고 두 원두가 섞임으로써 어떤 상호·상승작용이 일어났는 지 분석하고 추측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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