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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누를 다 마시고 나서 장을 보러 간 날, 새로운 프리미엄 스틱커피를 시도해 보려고 커피 코너를 기웃거려보았습니다. 약간의 호평과 아주 많은 혹평을 받고 있는 농심 강글리오가 과연 무슨 맛일까 궁금했는데 10개짜리 포장이 아닌 24개짜리 포장이었고(큰 포장으로 샀는데 입에 안 맞으면 나머지는 먹기도 기분나쁘고 버리기도 아깝고…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죠) 남아 있는 유통기한도 형편없이 짧아서 도로 내려놓았습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네스카페 수프리모 크레마(Nescafe Supremo Crema)를 집어들었습니다. 집에 와 펄펄 끓는 물을 부어서 한 잔 마셔보았습니다. 첫 모금은 그저 그랬습니다. 하지만 잔 밑바닥에 가까운 1/3정도의 커피는 반전이었지요. 인스턴트 커피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은, 상당한 수준의 산미를 내어 주었습니다.


 "텀블러와 차망으로 추출하는 티포트 브루 커피의 변법"이라는 긴 제목의 글을 쓰면서 밑바닥으로 갈수록 진한 맛이 올라오는 지금까지의 추출법(터키시 커피, 티포트 브루 커피, 텀블러와 차망으로 우려낸 커피)을 되돌아보았고, 또 네스카페 수프리모 크레마를 생각했습니다. 밑바닥으로 갈수록 맛이 진해지고 산미가 강해지는 건, 아마도 바닥에 가라앉은 미분에서 우러나온 맛 성분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다면 미분은 단순히 커피의 맛을 해치는 '커피의 적'은 아닐 겁니다.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는 한국에서 꽤 인기가 좋은 커피 추출법입니다. 둘 다 '원두 가루 사이를 통과하는 물의 흐름'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분쇄된 원두에 미분이 섞여 있으면 물의 흐름이 달라져 추출 결과가 달라지고, 보통은 나빠지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미분이 커피의 맛을 해친다는 인식은 아마도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라는 커피 추출법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널리 퍼졌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남들보다 적은 원두를 사용하고, 미분이 안 생길 리 없는 페퍼밀과 바라짜 엔코로 원두를 갈면서도 제법 만족스러운 커피를 추출해 왔습니다. 텀블러와 차망으로 추출하는 티포트 브루 커피의 변법은, 원두 8g으로 350mL를 추출합니다.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만들면서 1샷이 조금 안 되는 에스프레소를 붓는다면 맹탕이 되고 말 겁니다. 실제로 8g으로 350mL를 추출한 커피의 첫 모금은 맹탕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밑으로 갈수록 맛이 진해집니다. 1샷이 조금 안 되는 에스프레소를 부은 아메리카노는 밑으로 갈수록 맛이 진해질까요? 아니오. 미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밑으로 가도 맹탕입니다.


 저는 오히려 미분 덕분에 더 맛 좋은 커피를 마셔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종이 필터로 미분을 걸러냈다면, 그리고/또는 물의 흐름이 중요한 추출법을 사용했다면, 저의 커피는 처음부터 끝까지 맹탕이었을 겁니다.


 적어도 저의 커피생활에서, 미분은 단순한 적이 아닙니다. 잔 바닥에 얌전히 가라앉은 미분은 커피 맛을 좀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둥둥 떠다니는 많은 양의 미분은 커피 맛을 텁텁하게 만드는 적이지만, 잘 다스리고 잘 쓴다면 좋은 역할을 해내는 것이 또 미분입니다. 미분을 거의 만들지 않는 그라인더는 훌륭한 그라인더이고 미분을 모두 걸러내는 필터는 훌륭한 필터지만, 미분과 함께 커피를 즐기는 방법도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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