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백종원 대표가 유명해지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어진 커피 체인점 빽다방입니다.
빽다방의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hot)에는 더블샷이 들어갑니다. 빅사이즈 아메리카노에 더블샷이 들어간다는 건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지만, 빅사이즈 아메리카노에 더블샷을 넣으면서 1,500원 받고 팔기로 했다는 점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커피 맛이 궁금해졌고, 그래서 맛을 보러 갔습니다.
1,500원짜리 더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습니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양이 많은 더블샷이 나왔습니다. 한 모금 마셔보았습니다. 씁니다. 최후의 최후까지 추출한 에스프레소. 빅사이즈 아메리카노의 맛을 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테지만, 아메리카노의 재료가 아닌 에스프레소 그 자체를 즐기고 싶은 저에게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바리스타에게 에스프레소 추출량을 좀 적게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원한다면 다음 번에는 리스트레토로 해 주겠다. 주문할 때 이야기해 달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놀라웠습니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바리스타를 빽다방에서 만나다니!! 지금까지 메뉴판에 리스트레토가 없는 커피 체인점에서 더블샷 리스트레토를 주문했을 때 거절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빽다방에서는 샷을 좀 적게 뽑아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리스트레토로 해 주겠다는 답을 받은 겁니다. 저는 리스트레토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재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원두의 품질은 가격대비 준수한 것 같았고(최후의 최후까지 추출한 에스프레소에서도 탄내, 탄맛, 떫은 맛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해당 지점의 바리스타도 믿음직했으니, 꽤 괜찮은 에스프레소가 나올 것 같았거든요.
미세먼지가 심한 어느 날, 빽다방을 재방문하였습니다. 이런 날에는 손님이 평소보다 적을 테고,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실 여유를 잡을 확률이 꽤 높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두 개뿐인 테이블 중 하나가 비어 있었고, 저는 곧바로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더블 에스프레소를 리스트레토로 내려 달라는 주문을 넣었습니다.
저번에 방문하였을 때 '원한다면 다음 번에는 리스트레토로 해 주겠다'고 저에게 말한 바리스타는 자리에 없었지만 샷 추출량을 절반으로 줄여 달라는 저의 요청은 잘 접수되었고, 저는 잠시 후 리스트레토 더블샷을 받아들 수 있었습니다. 1
리스트레토로 내린 빽다방의 더블 에스프레소는 기본 세팅의 에스프레소보다 훨씬 부드러웠습니다. 쓴맛이 조금 줄어들었고, 쓴맛에 가려져 있던—하도 쓰다 보니 정신이 멍해져서 잡아내지 못했던 특성들이 하나 둘 감지되었습니다. 약간 와인 같기도 하면서, 조금 짭짤하고 비릿한 향미가 스쳤습니다. 제가 헙@ㅁ@!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강배전 케냐와 비슷한 특징이었습니다. 스타벅스 에스프레소 초이스의 과테말라와 비슷한, 조금 찌든 듯한—원두의 특징일 수도 있고, 어쩌면 로스팅 문제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는 스모키함도 느껴졌습니다. 에스프레소 자체의 달달함(sweetness)은 거의 없었지만,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고 물을 마시면 입안에 달달한 느낌이 돌았습니다. 2 3
빽다방의 더블 에스프레소는 가격 대비 훌륭한 맛이었습니다. '훌륭한 맛'에 무게를 두면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괜찮은 특성들이 부각됩니다. 케냐 같기도 하고 과테말라 같기도 한 다양한 맛의 양상들은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격 대비'에 무게를 두고 조금 비딱하게 해석하면 좀 더 비싼 커피에 비해서는 부족하다는 뜻이죠. 산미가 없고, 결점으로 취급될 만한 향미 특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약점이 됩니다.
빽다방의 에스프레소는 비교적 낮은 농도에서도 물, 우유, 시럽을 뚫고 커피 맛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지향점이 비슷한 스타벅스의 기본 에스프레소는 이름 길고 달달한 음료를 만들기에 좋은 재료입니다. 아메리카노를 만들거나 에스프레소 그 자체로 즐기기에는 좀 쓰고 독합니다. 빽다방의 에스프레소가 갖는 장단점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제가 집에서 커피를 생산할 수 있는데도 에스프레소를 종종 사 마시는 이유는 그 맛과 느낌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집에서 생산한 커피로는 충족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는 에스프레소를 좋아합니다. 이 기준을 넘지 못하는 에스프레소는 아무리 싸도 사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하루에 마실 수 있는 커피는 딱 한 잔이고, 하루에 한 장만 발급되는 카페인 쿠폰을 만족스럽지 않은 에스프레소에 써 버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5
빽다방의 에스프레소는 저의 기준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은 원두의 품질로 짐작됩니다. (바리스타의 실력을 의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찌든 듯한 스모키함이나 조금 역한 비릿함은 추출을 잘못해서 생기는 결점이 아니니까요) 원두의 품질은 생두의 품질이 좌우하고, 생두의 품질은 단가가 좌우하니(…) 빽다방의 원두 품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빽다방의 시스템과 직원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빽다방은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철저한 '카페'였고, 커피 체인점이었습니다. 한 명은 카운터를, 한 명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한 명은 제빙기를 담당하는 팀은 끝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주문을 효과적으로 소화해 내고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손님들의 이런저런 요청을 최대한 맞춰 주었습니다. 저를 상대한 두 명의 바리스타 모두가 메뉴판에 없는 리스트레토 추출을 할 수 있고, 해 줄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합니다. 메뉴판에 없는 리스트레토를 추출할 줄 안다는 건 자체 교육 과정에서 에스프레소 머신 조작법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거나, 그러한 역량이 있는 바리스타를 우선적으로 채용할 만큼 회사가(혹은 의정부로데오점 점장이) 직원의 역량을 중시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어느 쪽이든 놀라운 일이죠.
박리다매 모델의 프랜차이즈는 다매(多賣)를 필요로 합니다. 많이 팔기 위해서는 판을 크게 벌여야 하고, 판을 크게 벌이다 보면 고정비용이 늘어나고, 늘어난 비용을 감당하려면 많이 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인 미디어 커피찾는남자의 포스팅 <빽다방 커피, 어떠셨습니까?>는 테이크아웃 비율이 높은 빽다방의 매출이 곧 다가올 겨울에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매출이 줄어들면 버티기 힘들겠지요. 빽다방이 명목상 Since 2006이라지만, 2014년 7월만 해도 빽다방의 (직영)매장은 7곳에 불과했고(<출처>) 가맹사업을 개시한 후 빠르게 늘어 2015년 7월에 70여 곳, 2015년 11월에 240여 곳으로 늘었으니 대부분의 빽다방 지점은 겨울을 경험하지 않은 셈입니다. 그들이 매출이 줄어드는 시즌을 이겨낼 수 있는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미세먼지가 잔뜩 날아다니는 을씨년스러운 늦가을의 평일 저녁 시간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이곳은, 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
각주
- 빽다방 의정부로데오점에는 직원 3인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1명이 머신을 다루는 바리스타인 것 같습니다. 손님이 많은 만큼 작업량도 많을 테니 바리스타 한 명이 일주일 내내 자리를 지키는 것은 무리겠지요. [본문으로]
- 과추출로 인한 쓴맛이 줄어들었고, 추출된 에스프레소의 양이 줄어 쓴맛에 질리기 전에 모두 마실 수 있어서 그럭저럭 괜찮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디야의 에스프레소만큼은 썼습니다. [본문으로]
- 기본 세팅의 빽다방 에스프레소를 마셨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가끔씩 이렇게 물로 가셨을 때 입안에 단맛이 남는 커피를 만나게 됩니다. [본문으로]
- "에스프레소 로스트"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가리킵니다. ('기본 에스프레소'로 칭한 이유는, 300원을 추가하고 이달의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선택할 수 있는 '에스프레소 초이스' 옵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스타벅스의 에스프레소 초이스>를 참조하세요) [본문으로]
- 원두커피를 마실 때 (인스턴트 커피가 아닌) '원두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른 종류의 커피를 마실 때는 들지 않는 그런 느낌입니다. [본문으로]
- 빽다방 홈페이지 '매장찾기'에 등록된 매장 개수는 2015년 11월 8일 현재 249곳입니다. 그리고 2016년 4월 19일 현재 459개로, 겨울을 넘기기 힘들 것이란 저의 예상과 달리 계속 불어나고 있습니다. http://www.paikdabang.com [본문으로]
'카페 > 카페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들을위한숲 가능점 (0) | 2016.02.08 |
---|---|
불국사 카페 루머팡 (진수미가 불국사점) (0) | 2015.12.14 |
로스터리 카페 젬인브라운 (0) | 2015.10.19 |
로스터리 카페 시드누아 (Seednoir) (0) | 2015.06.08 |
유로스타커피 창동점 (0) | 2015.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