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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다방은 한때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의 역할을 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입니다. 학림다방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영업중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입니다. 학림다방은 '학림 블렌드'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드립 커피를 내리는 로스터리 카페입니다. 여기까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몇 주 전 도서관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15잔>이라는 책을 뽑아든 적이 있습니다. 그쪽 서가에 꽂힌 커피 책 중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몇 권 남지 않아서, 수필 성격이 짙은 커피 책이라도 읽고 싶어서였습니다. 1
그 책의 앞부분에 학림다방이 나왔습니다. 저의 눈을 끄는 것은 3대 학림지기 이충렬 씨의 이야기였죠. "여기서는 맥심을 팔아도 팔려." 하지만 그는 맛있는 커피를 팔고 싶었다고 합니다. 커피인으로서의 자존심, 혹은 자부심이었죠. 하루 수십 잔의 커피를 마시다가(당시에는 맛을 보고 뱉는 '커핑'이라는 방법이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합니다)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그런 우여곡절끝에 '학림 블렌드'라는 블렌딩과 '학림 로열 브랜드' 같은 메뉴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학림다방을 찾았습니다. 로열 브랜드를 주문하자 직원이 물어봅니다. "로열 브랜드는 아주 진한 메뉴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진한 메뉴라는 걸 알고 왔다고 답을 했고, 직원은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2
로열 브랜드는 이충렬씨가 핸드드립으로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맛을 내고자 개발한 메뉴입니다. 학림 블렌드 30g을 갈아 넣어 에스프레소 1샷 정도의 양만 받아낸 것인데, 정말 진합니다. 크레마가 없고 3, 쓴맛이 강하지 않으며 4, 진득한 바디와 와인의 느낌이 아주 인상적인 커피입니다. 로열 브랜드에는 설탕과 물이 함께 나옵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방법을 감안해서겠지요. 설탕을 넣어서 한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면 입안에 향기가 퍼진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설탕 없이 마셔도 괜찮을 만큼 쓴맛이 적고, 천천히 마시면서 온도에 따라 변하는 맛과 향을 즐겨도 좋을 만큼 그 변화가 재미있어서, 에스프레소처럼 마시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5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습니다. 다방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은 가파르고 급하게 90도로 꺾여 있었고, 복도 천장에 매달린 전등에는 양옥집 현관에서 종종 볼 수 있던 네모난 전등갓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다방 안에는 역전다방에 있을 만한 회색빛의 각진 직물소파와, 꽤 오래된 원목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직원은 가끔씩 LP 플레이어에 판을 갈아넣었고,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쇼팽 같은 작곡가의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학림다방은 고풍(古風)이 아닌, 고(古)입니다. '이 정도쯤은 바꿔도 괜찮지 않나' 싶은 옛것도 좀 있었습니다. 오래된 직물소파는 꽤나 칙칙한 색깔이었고, 어두운 갈색의 원목탁자는 카페보다는 막걸리집에 좀 더 어울릴 만한 물건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이 학림다방이라는 공간이 추구하는 가치에 직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림다방에는 중장년층 고객이 많이 찾아옵니다. 학림은 그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입니다. 내가 아는 아이돌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 TV의 음악프로처럼 그들을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학림다방에는 젊은 고객도 많이 찾아옵니다. 학림은 그들을 '어색한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는 공간입니다. 훌륭한 로스터리 카페이기도 하고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키되, 낡지 않게 가꾸어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본래 모습을 유지하다 보면 낡아 버리기 쉽고, 낡지 않게 가꾸다 보면 본래 모습을 잃기 쉽지요. 학림다방은 꽤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래된 직물소파와 원목탁자는 무척 깔끔했고, 음향 장비는 클래식의 선율을 잡음 없이 청아하게 재현하고 있었죠. 창가 자리의 '예약석'에는 사진 찍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6 그들은 옛 벽돌 건물의 정취가 살아 있는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7
카페라는 공간에서 즐거움을 얻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가르침을 얻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학림은 저에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을 감싸안을 수 있는 비결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가르침을요.
설(說)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인 글의 장르를 리뷰로 돌려놔야겠습니다. 학림에 방문하게 된다면, 이 공간이 지향하는 가치를 한 번 음미해 보세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면서 여러분의 느낌을 찾아 보세요. 학림의 커피와 함께요. 아주 색다르고 기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각주
- 커피 에세이 중에는 시시껄렁한 책이 좀 있습니다. 그런 책에도 새로운 지식이나 유용한 지식 하나둘은 있는 게 보통이지만, 가끔은 다 읽고 나서도 건질 것 하나 없어서 책장을 덮으며 '내가 뭐하자고 이걸 읽었나' 후회가 되는 책도 있습니다. 몇 번 이런 일을 겪고 나서는 수필 냄새가 나는 커피 책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똥을 밟는 일을 피하려면 그쪽으로는 걸어다니지 않으면 되지, 길이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략 이런 생각으로요. [본문으로]
- Royal Blend. '로열 블렌드'라고 적는 게 맞겠지만 l을 r처럼 취급하기도 하던 예전 표기를 그대로 둔 듯합니다. 메뉴 이름에 '블렌드'가 들어가지만, 특별한 블렌드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메뉴도 '학림 블렌드'를 사용해 만듭니다) [본문으로]
- 참고로 '스트롱'은 학림 블렌드 20g을 갈아 만드는 진한 드립커피입니다. 에스프레소 1샷 정도의 양을 받는 로열 브랜드와는 달리, 스트롱은 드립커피 한 잔 분량을 받는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 고압의 스팀 혹은 열수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가 아니니까요. [본문으로]
- 학림 블렌드는 쓴맛이 강한 강배전 블렌드가 아닙니다. 제 짐작에는 시티 후반 정도의 로스팅인 것 같았습니다. [본문으로]
- 소파에는 터진 곳도 없고, 해어진 곳도 없고, 얼룩도 없고, 먼지처럼 직물이 부서져나오는 곳도 없었습니다. 원목탁자에는 광택이 살아있었고요. [본문으로]
- 큰길을 향한 벽에는 통유리로 창이 나 있습니다. 대학로가 아주 잘 보여서 눈이 시원하지요. 하지만 벽 전체를 뚫지는 않았고, '예약석' 쪽은 옛 창문을 남겨 두었습니다. 좁고 키가 큰 창, 옛 벽돌 건물에 있을 법한 창이 남아 있는 이 자리는 사진 찍기에 좋은 자리입니다. 사진을 찍고자 하는 손님이 언제든 앉아서 찍을 수 있게 자리를 비워두려고 예약석 표지판을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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