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원두 : 엘살바도르 SHG 라 디비나 프로비덴시아 (El Salvador SHG La Divina Providencia) 200g

 입수일 : 2015. 4. 12.

 입수처 : 커피플랜트 (2015 서울커피엑스포에 설치된 부스에서 구입)


 저의 쉰네 번째 커피는 엘살바도르 SHG 라 디비나 프로비덴시아였습니다.



 커피플랜트 홈페이지에는 "엘살바도르 SHG 디비나 워시드"라는 상품명으로 올라와 있으나, 농장 이름을 다 적어주는 편이 좋을 듯하여 제목을 '엘살바도르 SHG 라 디비나 프로비덴시아'로 잡았습니다.


 La Divina Providencia는 에스파냐어로 '신의 섭리'를 뜻합니다. Providencia에 해당하는 영단어 providence는 라틴어 "예견"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provident에 '선견지명이 있는' 이라는 뜻이 있고, provide에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두고) 공급하다'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따라 providence는 '신의 예비(豫備)하심'으로 풀이하면, 세상은 신이 예비하신 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줄줄이 사탕이네요.


 무척 오랜만의 엘살바도르입니다. 7개월 전에 엘살바도르 COE 2013 4위 Peña Redonda를 산 적이 있지만, 일반 등급의 엘살바도르는 1년 6개월 전 전광수커피하우스의 엘살바도르 이후 처음입니다. 올해 커피엑스포에서는 엘살바도르와 케냐 원두를 입수해야겠다고—그러니까, 단짝에게 사 달라고 졸라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정해 둔 상태여서 물건 고르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엘살바도르를 정해 두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스페셜티나 COE가 아닌 엘살바도르를 마셔본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릴 겸 다시 맛을 볼 때도 되었고, 엘살바도르는 부르봉 단일 품종으로 구성된 원두를 찾기 쉬운 나라여서 'bourbon flavor'[각주:1]를 맛보기에도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취미보다는 학습 쪽에 가까운 선택이긴 합니다만, 연습곡(etude)에도 맛이 있는 것처럼 공부하는 마음으로 골라든 원두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게 마련이고, 취미 생활을 좀 더 깊이 있게 하려면 가끔은 이런 학습도 필요하니까, 한 번 마셔보기로 했습니다.




 결점두를 골라내기 위해 봉투를 개봉하니,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에서 풍기는 듯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결점두가 거의 없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깨진 콩, 기형/미성숙 콩, 조가비 모양의 콩, 벌레 먹은 콩은 보이지 않았고, 퇴색된 듯한 진흙 빛깔의 콩이 10여 알 있을 뿐이어서 결점두로 간주하고 골라내었습니다. 시작이 좋군요.


 이번 엘살바도르는 커피빵이 잘 부풀지 않는 편에 속합니다. 커피빵이 잘 부풀지 않는 대신, 추출된 커피에는 오일이 매우 풍부합니다(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터키시 커피는 거품이 보글보글 치솟는 것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는 추출법이기 때문에, 커피빵이 잘 부풀지 않는 않는 원두로 터키시 커피를 끓이면 과추출이 되기 쉽습니다. 커피빵이 잘 부풀지 않는 원두는 거품도 잘 치솟지 않거든요. 이러한 원두를 리뷰할 때는 타이머를 사용하는, 따라서 커피빵이 부푸는 정도에 상관없이 일정한 추출 수율을 유지할 수 있는 추출법(파보일드 커피나 티포트 브루 커피 등)의 결과물을 감안하여 의견을 보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살바도르 SHG 라 디비나 프로비덴시아의 주요 특성은 볶은 곡물 내지는 보리차 같은 고소함, 다크초콜릿을 닮은 맛과 입 안의 감촉, 캐러멜 같은 달콤한 냄새, 쌉쌀함·고소함·달콤함과 같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양상 속에서 드러나는—존재감이 있지만 다른 맛을 압도하지는 않는 산미, 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균형감과 재미남·맛깔남 정도로 요약이 됩니다. 이 특성들은 제가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추출법(터키시 커피, 파보일드 커피, 티포트 브루 커피)에서 모두 잘 드러나는 편입니다.


 조금 과추출된 터키시 커피에서는 약간 쌉쌀하고 진득한 다크초콜릿의 맛이 났습니다. 이번 엘살바도르는 대체로 마일드 커피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지만, 조금 과추출을 하면 미디엄 바디에 가까워지고 복합적인 맛이 강해져서 제법 강한 커피가 됩니다. 강한 맛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엘살바도르는 조금 과추출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잡맛'으로 분류할 만한 좋지 않은 맛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과추출을 할 여지가 있습니다.


 파보일드 커피에서는 엘살바도르의 복합적인 맛 중 감칠맛이라 부를 만한 특성이 한결 뚜렷해집니다. 바디는 가벼워지지만 고소함·달콤함·감칠맛과 같은 복합적인 양상 속에서 드러나는 산미를 즐기기에는 매우 좋아서, 명랑하고 맛깔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아주 좋습니다.


 티포트 브루 커피에서도 역시 복합적 양상 속에서 산미가 드러납니다. 잡맛이 거의 없는 원두이기 때문에 티포트 브루 커피로 추출해도 여전히 깔끔합니다. 타이머를 사용하기 때문에 과추출을 피하기 쉬워서, 파보일드 커피보다는 조금 바디감이 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티포트 브루 커피와 유사한 추출법인 프렌치프레스에서도 꽤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엘살바도르 SHG 라 디비나 프로비덴시아는 좋은 특성을 두루 끌어안은 마일드 커피입니다. 잡맛이 없기 때문에 조금 과추출을 하거나, 평소보다 많은 원두를 투입해 농도를 높일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3회 연속으로 콜드 브루 추출을 하였을 때 전광수커피하우스의 엘살바도르가 무척 향이 진하고 쌉쌀한 커피로 재탄생하였듯이, 이번 엘살바도르도 추출 수율을 높이거나 농도를 높였을 때 맛이 변화할 여지도 많은 원두입니다.


 저는 마일드 커피를 좋아합니다. 이번 엘살바도르는 봄과 가을의 서늘한 저녁나절에, 따뜻하게 한 잔 내려 홀짝이기 좋은 커피죠. 계절에 딱 맞는 원두입니다. 커피플랜트가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하네요. 여름이나 가을쯤에 새로운 생두가 입고되면, 한 번 주문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각주


  1. "…또한 Bourbon 특유의 맛과 향을 가졌는데,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새콤한 맛, 달콤한 뒷맛 등이며, 이를 Bourbon Flavor라고 부른다." 전광수 외 (2008) <기초 커피 바리스타> 형설. p.36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