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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 : 과테말라 산타로사 SHB 내추럴 EP (Guatemala Santa Rosa SHB Natural EP) 200g

 구입일 : 2015. 3. 5.

 구입처 : 통인동 커피공방


 저의 쉰세 번째 커피는 과테말라 내추럴 EP였습니다.



 파나마 게샤 블렌드를 주문하면서 무엇을 함께 살까 고민을 좀 하다가, 과테말라 내추럴 EP를 골랐습니다. 건식으로 가공한 과테말라 원두를 아직 마셔 본 적이 없었거든요. EP는 European Preparation의 약자로, 결점두의 개수가 적고 스크린 사이즈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도록 맞춘 생두에 붙는 말이라고 합니다. '해발 1,400m' 기준에만 부합하면 알이 자잘하거나 결점두가 많아도 SHB가 붙는 과테말라 등급 기준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겠지요.


 택배를 수령하자마자 핸드 소트를 실시했습니다. 퀘이커로 의심되는 콩이 거의 없었습니다. 상당한 공을 들인 생두를 쓴 것 같습니다. 결점두로 분류한 콩의 대부분은 블리스터(blister)였습니다. 보관중에 생두가 얼었거나 로스팅 중에 화력이 좀 강하게 들어간 탓이겠지요. 채프를 태워먹은 콩이 꽤 있었는데, 정도가 심한 콩 몇 개만 건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브라질 원두와 건식 가공한 원두의 채프가 탄 걸 여러 번 봐서 익숙해질 때도 되었고, '건식다운' 맛과 향을 기대하고 산 원두에 채프가 탄 콩이 좀 섞인다고 커피 맛이 나빠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습니다. 혹시 탄맛이 나더라도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해 마시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시치우 크루제이루 때처럼요. 오래 전 모레니냐 포르모자 때 예비 분쇄를 하면서 타 버린 채프를 일일이 골라낸 적도 있었는데… 그때는 파보일드 커피라는 추출법을 고안하기 전이었으니 타 버린 채프의 탄맛과 탄내를 피할 방도도 없었고, 전동 그라인더를 구입하기도 전이라 원두를 분쇄하는 과정에 더 많은 공을 들이던 때였으니 그랬을 겁니다.



 와인의 느낌이 강하고, 산미가 적고, 티포트 브루 커피로 추출하였을 때 '에스닉한' 특성이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번 과테말라 내추럴은 에티오피아 짐마 G2 내추럴과 비슷합니다. 과테말라 건식이 에티오피아 건식과 전반적으로 비슷한 특징을 가진다니… 언젠가 파나마 다이아몬드마운틴을 리뷰하면서 "이름표가 안 붙은 이르가체페와 다이아몬드마운틴을 커핑으로 구분할 자신은 없습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프리카 커피와 중남미 커피가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는 것은, 산지 외의 요인이 산지 요인—테루아(terroir) 혹은 미기후(微氣候, microclimate)—만큼이나 커피의 맛과 향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겠지요. 이번에는 건식 가공이라는 가공법이 대서양을 사이에 둔 과테말라 산타로사와 에티오피아 짐마의 커피로 하여금 비슷한 특징을 갖게 했을 겁니다.


 좀 더 세부적인 특징을 논하면 과테말라 내추럴의 개성이 드러납니다. 제가 지금까지 마셔본 커피 가운데 와인의 느낌이 가장 강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winey합니다. 쌉쌀한 맛이 조금은 풀 같고(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블루마운틴인도네시아 블루 플로레스를 리뷰하면서 구절초 같은 쓴 맛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과테말라 내추럴은 그 정도로 쓰지는 않습니다), 약간 시다모를 닮은 고구마의 구수달달함이 느껴집니다. 조금 콤콤하고 약간은 흙 같고(earthy), 지금까지 말한 특성들이 한데 모여 '에스닉한' 이미지를 구성합니다. 산미는 적은 편이어서 마지막에 조금 올라오는 정도고, 뒷맛에 달콤함이 있습니다.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하였을 때 생담배 같은 느낌이 조금 스쳤었습니다.


 과테말라 내추럴은 티포트 브루 커피로 추출하였을 때 풀바디에 가까운 입 안의 감촉과 쌉쌀하고 톡 쏘는 느낌을 즐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에스닉한 특성도 티포트 브루 쪽에서 좀 더 잘 드러났고요.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하면 에스닉한 특성과 바디감이 많이 줄어들고 쓴맛은 여전한데 산미는 잘 드러나지 않아서 컨셉과 방향이 흐릿해진다는 느낌이 있지만, 와인의 느낌에 덮여 잘 드러나지 않았던 고구마 같은 구수달달함이나 생담배의 향미 같은 디테일을 감상하기에는 좋았습니다. 터키시 커피로 추출한 결과는 티포트 브루 커피로 추출한 결과와 유사했는데, 상당히 강한 쓴맛이 다른 특성을 덮는 경향이 있어 균형감이 좋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예멘 모카 마타리와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를 반씩 섞은 안알랴줌 블렌드는 제 마음 속의 고향 같은 커피입니다. 그래서 와인의 느낌이 있는 원두나 산미가 좋은 원두를 만날 때마다 안알랴줌 블렌드의 마타리나 이르가체페를 대신할 수 있을까, 대신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과테말라 내추럴은 쌉쌀하고 톡 쏘며 뒷맛이 달기 때문에, 과테말라 내추럴과 이르가체페를 반씩 섞은 안알랴줌 블렌드는 여름에 아이스 커피로 마시면 상큼하고 시원해서 좋을 것 같네요.


 와인 같고 쌉쌀한 원두를 기대했던 저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커피였습니다. 올해 들어 쓴 원두 리뷰 다섯 개 중 셋이 과테말라인데 맛과 특성이 제각각이라 참 흥미롭네요. 역시 커피는 많이 마시고 볼 일입니다(ㅋㅋㅋㅋㅋ). 어쩌다 보니 리뷰 순서가 바뀌었는데, 쉰두 번째 커피인 파나마 게샤 리뷰는 다음 주에 올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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