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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 : 온두라스 마리&모이 (Honduras Mary&Moi) 500g

 구입일 : 2015. 7. 26.

 구입처 : 테라로사 커피 광화문점


 저의 예순 번째 커피는 온두라스 마리&모이였습니다.



 세 번째로 구입한 킹콩입니다. 작년에 구입한 르완다 마헴베와 케냐 루타카가 매우 독특한 원두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먼저 커피 맛을 보고 원두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500g을 샀는데 혹시라도 입에 안 맞으면 먹어 없애는 일 자체가 고역이니까요. 리뷰가 올라왔다는 점에서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마리&모이는 제 마음에 들었고 저는 이 원두를 사게 되었습니다.


 마리&모이는 농장주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마리사벨(Marysabel)과 모이세스(Moises)가 농장의 주인이고, 농장 이름은 엘 푸엔테(Finca El Puente)입니다. 비교적 약하게 볶은 까닭에 원두의 빛깔이 비교적 옅은데, 제가 퀘이커로 간주해 골라내는 옅은 황토색 콩과 색이 비슷해서 결점두와 정상두의 경계가 좀 모호했습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많은 양의 원두를 샀으므로 무고한 콩의 희생을 감수하고(…) 겉보기에 좀 수상쩍은 콩은 최대한 골라냈습니다. 깨진 콩, 기형/미성숙 콩, 조가비 모양의 콩은 거의 없었습니다. 생두의 QC가 비교적 잘 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핸드 소트 과정에서 작은 돌을 하나 골라냈습니다. 돌이야 확률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그라인더 날에 끼이기 전에 골라냈으니 다행이지요. 원두 500g을 뒤적인 보람이 있었습니다.




 온두라스 마리&모이의 향미 프로파일은 무난합니다. 목젖으로 감상하는 과일의 느낌이라든가 베보자기로 과육을 걸러낸 과일주스같은 맛은 없었습니다. 독특하다 못해 가끔씩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는 킹콩 치고는 예외적인 것 같기도 한데… 저에게는 다행한 일입니다.


 곡물 같은 구수함과 약간의 달달함, 첫 모금을 삼키고 난 뒤 입안에 남는 쌉쌀한 뒷맛, 비교적 일찍 올라오는 새콤한 산미가 마리&모이의 주요 특성입니다. 제가 에스닉하다고 표현하는 콤콤함, 구릿함, 향신료를 닮은 냄새는 사실상 감지되지 않는, 깔끔한 계열의 커피입니다. 산미가 비교적 일찍 올라오고, 적당한 온도에 진입하면 쓴맛이 물러나고 바디감이 진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첫 모금의 바디는 비교적 가볍지만, 진해지고 나면 중간 정도의 바디감입니다.


 추출 결과물이 저의 상식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서 '이놈 보게?' 싶었습니다. 터키시 커피로 추출하면 보통 바디와 쌉쌀함이 부각되고 산미는 상대적으로 좀 억제되기 마련인데 의외로 터키시 커피에서 산미가 잘 느껴졌습니다. 크랜베리를 닮은 새콤함이었죠.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했을 때는 보통 산미가 강조되기 마련인데 그렇게까지 새콤하지 않았고, 티포트 브루 커피의 경우 바디와 복합적인 맛이 부각되고 산미가 억제되기 마련인데 의외로 새콤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추출법이 궁금하시다면 <이 블로그의 커피 추출법>을 읽어주세요. 저의 터키시 커피는 일반적인 터키시 커피와는 그 특성이 많이 다릅니다)


 마리&모이는 제가 '복합적인 맛'으로 칭하는, 산미/쌉쌀함/달달함 외의 다양한 맛들[각주:1]이 적은 깔끔한 계열의 커피고, 쓴맛 또한 강하지 않기 때문에 산미를 가릴 만한 맛이 별로 없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쓴맛과 복합적인 맛이 산미를 억제하기 때문에 (쓴맛과 복합적인 맛을 덜 추출하는 경향이 있는) 파보일드 커피를 사용하면 산미가 살아나지만, 마리&모이 같은 경우는 쓴맛과 복합적인 맛이 산미를 가릴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산미와 상승작용할 미각적 요소가 있는 터키시 커피 쪽에서 괜찮은 산미가 감지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수박에 소금을 조금 묻히면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듯, 약간의 쌉쌀함과 복합적인 맛은 커피의 산미를 더 강조할 수도 있나 봅니다.


 마리&모이의 향은 정말 좋습니다. 콜드 브루 커피로 추출하면 과일을 닮은 달콤한 향기가 잘 살아나는데, 다 마신 잔 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가 방 안을 향기로 채울 만큼 향이 짙고 그 결도 곱습니다. 평소에는 원두의 특성을 파악할 때 한두 번 쓰고 마는 콜드 브루 커피를 계속 사용하게 될 만큼 마음에 들었습니다.


 원두의 빛깔이 비교적 옅어서 그런지, 이 원두로 추출한 커피의 빛깔도 연합니다. 시티 정도로 볶은 원두로 추출한 커피와 비교하면 같은 양의 원두를 투입해 같은 분량을 추출해도 마리&모이 쪽이 눈에 띄게 톤이 밝습니다. 커피를 끓일 때 카푸치노 빛깔의 거품이 치솟는 점도 특이하고요(보통 터키시 커피나 파보일드 커피를 끓일 때 치솟는 거품은 훨씬 진한 '커피색'입니다).




 원두 리뷰를 작성할 때 시간을 얼마나 들여야 하는가—이는 저에게 정답 없는 숙제처럼 남아 있습니다. 급하게 써서 올리면 원두의 중요한 특성을 놓칠 수 있고, 특성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원두가 그새 품절되거나[각주:2] 달이 넘어가서 '이 달의 기획/할인상품'이 지나가 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원두 구입에 참고하려고 리뷰를 찾는 독자에게는 영양가 없는 글이 되어버립니다. 원두 판매자에 대한 피드백이나[각주:3] 개인적인 기록 용도로는 쓸모가 있겠지만요.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테이스팅을 하면 심도 있는 리뷰를 시의적절하게 작성해서 올릴 수 있겠지만 취미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은 무리고, 결국 리뷰의 품질과 신속성 사이에서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품질 쪽에 좀 더 욕심을 내고는 있지만, 늦은 주제에 내용도 부실한 리뷰가 나오면 대체 뭘 한 걸까 싶어 좌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번 리뷰는 분량이 좀 나왔네요. 원두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여러 가지 추출법으로 추출한 커피를 충분히 마실 수 있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르완다 루붐부 스페셜티 리뷰로 찾아뵙겠습니다.




 각주


  1. 감칠맛일 수도 있고, 잡맛일 수도 있고, 바디감에 영향을 주는 그 외의 복잡미묘한 맛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2. 제품 구색에 연연하지 않는 다품종 소량생산 로스터리는 여러 종류의 생두를 사들여 그때그때 볶아 팔다가 재고가 동나면 그대로 품절 처리하고 제품 리스트에서 빼 버립니다. 테라로사, 모모스, 커피 리브레가 대략 이런 스타일인데, 모모스의 경우는 특히 회전 속도가 빨라서 인기가 좋은 제품은 서너 달 지나기도 전에 빠지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3. 미 품절된 상품에 대한 리뷰도, 판매자가 다음 번에 생두를 구입할 때나 다음 번에 커피를 볶을 때 참고할 수는 있겠지요. 소비자가 어떤 향미를 선호하는지, 이러한 커피는 어떻게 로스팅했을 때 반응이 좋았는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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