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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이 맞는 이유'를 내세워 주장하기는 쉽습니다. 신인을 띄워주기 위해서든, 신상품을 마케팅하기 위해서든, 자소서를 읽을 담당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든,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틀린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료를 뒤적이고 논증을 분석하여 근거가 잘못되었거나, 근거와 주장의 관계가 부적합하거나, 논증의 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는 많은 시간이 들어갑니다. <세계 3대 커피와 그 뒷이야기>, <빈센트 반 고흐는 정말 예멘 모카 마타리를 좋아했을까>와 같은 글은 자료조사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들어간 글입니다. 블로그에 올리는 모든 글을 이런 식으로 쓰자면 3일에 한 번 포스팅하기도 힘에 부칠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쓴 글이나 주장에서 오류를 발견해도 왠만하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굳이' 지적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 오류가 존재한다고 사회가 어지러워지거나 지구가 멸망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제가 이 블로그에서 뭔가를 깐다면, 그 이유는 보통 둘 중 하나입니다.


 1. 까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화가 나서

 2. 왠지 이걸 올리면 방문객이 늘어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어느 이유에서일까요? 질문의 형식으로 던지기는 했지만, 아마 지금쯤 다들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이, 혹은 네덜란드 선원들이 더치 커피를 마셨을 것이라는 내용은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치 커피는 17세기 네덜란드(Dutch)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자국으로 커피를 운반할 때 장시간 항해에 적합한 방식으로 고안해내 더치 커피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아일보 인터넷 기사>[링크]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자국으로 커피를 운반할 때 장시간 항해에 적합한 방식으로 고안해낸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비즈 인터넷 기사>[링크]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식민지에서 커피를 유럽으로 운반하던 선원들이 장기간의 항해 도중에 커피를 마시기 위하여 고안한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도 하고…" —<두산백과 "더치 커피" 항목>[링크]


 물론 해당 내용을 의심하는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설은 없다." —<두산백과 "더치 커피" 항목>[링크]


 "더치커피는 네덜란드 무역상인에 의해 시작됐다고 알려졌지만 정작 네덜란드에는 더치커피가 없다. 최근 아시아를 중심으로 더치커피가 인기를 얻으면서 네덜란드에서도 마케팅적 요소로 활용을 하고 있다." —<뉴스엔미디어 인터넷 기사>[링크]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은 정말 더치 커피를 마셨을까요?


 빈센트 반 고흐가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시지 않았을 것 같음'을 주장하기 위해 그의 편지를 뒤적여서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셨다는 기록이 없음'을 찾아냈던 예전 글의 전개방식을 떠올려보면,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이 더치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것 같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뭘 먹었는지(혹은 뭘 먹었을지)를 뒤적여보고 '더치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없음'을 찾아내야겠지요. 아니면 '더치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리가 없음'을 뒷받침할 만한 정황을 찾아내거나요. 그래서 자료를 좀 뒤져보았습니다.


 저는 출판된 도서 혹은 그에 준하는 전자문서(출판물의 PDF버전 등)를 자료로 쓰는 것을 선호합니다만, 뱃사람들의 식생활을 다룬 도서를 찾기가 어려워, 관련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 블로그 포스팅을 많이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해당 블로그 포스팅은 출판된 도서 등을 자료로 인용하여 글을 전개하였으니, 적어도 2차 내지 3차 자료에 준하는 신뢰성은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 혹은 선원들이 더치 커피를 마셨을 것이라는 글을 살펴보면 '장기간의 항해'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더치 커피를 고안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무렵의 항해가 어땠으며 그 무렵의 사람들이 어떤 것을 먹고 마셨는지 살펴보아야겠지요.


 우선 항해 중 선원들의 식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선상 생활은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 신선한 음식은 출항 후 몇 주 안에 다 떨어졌고 그러면 염장 고기, 말린 생선, 콩이 주식이 되었다. …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수의 부족이었다. 물은 쉽게 상했다. 썩어서 찌끼가 뜨고 악취가 심한 물을 마시려면 코를 잡고 이를 앙다물어서 찌끼를 걸러내면서 마셔야 했다.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나무통이라는 사실은 아주 늦게야 알려졌다. 해결책은 금속 용기를 쓰는 것이었으나, 이는 상당히 뒤늦은 시기에 도입되었다. … 태평양을 넘을 때에는 선원들 절반이 죽는 것은 보통이었고 심지어 사망자가 75%에 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배 위의 '노동자' 죽음보다 비참한 삶>(주경철)[링크]


 18세기 선원들의 삶을 묘사한 인터넷 칼럼의 한 부분입니다. 당시에는 나무통에 물을 저장하였기 때문에 물이 쉽게 상했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를 한 번 보겠습니다. 나폴레옹 전쟁(1797~1815년) 당시 영국 해군 장병의 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음식도 형편없었습니다. 당시 선원의 전형적인 식사는 만든지 최소 6개월은 지난 건빵과, (소금에 절인 지 역시 최소 몇달은 지난) 삶은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콩 삶은 것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육군과 마찬가지로 럼주, 정확하게는 럼주와 물을 섞은 그록(grog)이 매일 일정량 주어졌습니다. 럼주의 배급량은, 육군의 매일 1/3 파인트의 럼보다 조금 더 많은, 매일 1/2 파인트의 럼과 1갤런의 맥주였습니다. 특히 물의 배급이 제일 심각했습니다. 나무통에 장기간 저장되는 물은 쉽게 상해서 몇 개월 지나면 푸른색 부유물이 가득했는데, 이나마 무척 절제하여 배급이 되었고, 긴 항해의 막판에는 정량의 절반만 배급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의 생활>(nasica)[링크]


 딱히 나을 게 없습니다. 역시 나무통에 저장된 물이 쉽게 상하는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금속 용기를 쓴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철제 식수 탱크가 도입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철제 식수 탱크는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세로 받아들여져, 19세기 중반 이후의 선박들은 모두 이런 물탱크를 장치했습니다. 가령 미국의 2200톤 급 쾌속 범선(clipper)인 '바다의 여제(Empress of the Sea)' 호에는 6000 갤런짜리 철제 식수 탱크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하루 3.4리터의 배급량으로 환산하면, 100명의 선원에게 약 66일간 식수를 제공할 수 있는 양입니다. 당시 쾌속 범선이 대서양을 건너는데 약 1달 정도가 걸리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한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나먼 항해를 위한 물과 술 이야기>(nasica)[링크]


 지금까지 18세기~19세기 초 선원과 해군 장병의 생활을 둘러보았습니다. 특별한 이변을 상정하지 않는 이상 17세기 선원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생활하였을 것이고 그들도 나무통에 마실 것을 저장하였을 것입니다. 물조차도 쉽게 상하는 나무통에 더치 커피를 장기간 저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무통에 저장하면 쉽게 상하고 금속 용기는 당시에 사용하지 않았다면, 유리병에 담아보는 것을 생각해 볼 만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유리병은 선원들이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1903년에 개발된 유리병 제조기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17세기~18세기의 유리병은 사치품에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오웬스(1859~1923)의 자동식 유리병 제조기는 제조 공정의 속도를 높이고 가격을 낮춰 유리 산업에 혁명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여러 관련 분야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으며 아이들이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행위를 근절시켰다. 그 당시 유리불기는 가장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기술 중 하나였는데, 종종 그 업무를 위해 아이들을 값싼 임금으로 고용하였다.


 …(중략)…


 두 명의 근로자만 있으면 작동시킬 수 있는 오웬스의 첫 번째 자동식 병 제조기는 회전식 프레임에 다섯 개의 펌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하루에 1만 7,000개 가량의 유리병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는 반자동 제조기보다 6배 이상 높은 생산량이었다. 유리가 여전히 값비싼 아이템이었던 시기에 그는 병을 동일한 크기로 제조할 수 있도록 했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명품 1001>(잭 첼로너)[링크]


 따라서, 17세기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장기간의 항해에 더치 커피를 마시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인들은 어땠을까요? 부유한 상인들이라면 유리병을 많이 사들일 돈이 있을 테니, 더치 커피를 유리병에 저장했다가 항해 중에 마실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찬물로 추출하는 더치 커피에는 세균이 번식하기 쉽다는 게 문제입니다.


 <리포트> 이렇게 불결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커피. 게다가 끓는 물이 아니라 찬물로 커피를 내리는 만큼, 세균이 검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많게는 기준치의 260배 이상 초과한 세균이 나온 곳도 있습니다.


 <인터뷰> 김종철(서울시 특사경) : "이런 용기가 위생적으로 세척되지 않았고 공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세균이, 낙하세균이랄지 이런 일반 세균이 침투할 수 있는." —<KBS뉴스>[링크]


 2013년 11월에 방영된 뉴스의 일부입니다. 끓는 물로 커피를 추출한다면 어느 정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커피를 추출하여도 세균이 대부분 죽어 사라지겠지만, 찬물로 추출하는 더치 커피는 세균이 번식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위생적인 환경에서 추출한 다음 멸균한 병에 병입하고 밀봉한다면 어떨까요? 파스퇴르가 발효균이나 부패균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이 1800년대 중반이고, 미생물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에 경험적으로 가열과 밀폐라는 방법을 사용해 병조림을 발명한(정확히는, 나폴레옹의 식품보존법 현상공모에서 채택된) 때가 1800년대의 첫머리입니다. 17세기의 경험과 지식의 수준은 더치 커피에서 세균이 번식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미생물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때이니 더치 커피를 제조하였더라도 그 제조 환경은 그리 위생적이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7세기의 네덜란드 상인들이 유리병에 더치 커피를 보관했더라도 그 위생 수준은 보잘것 없었을 것입니다. 항해하는 동안 더치 커피에서 세균이 번식하고 그 세균 중에 부패균이 있다면 커피가 상했겠지요. 이렇게 상하면 더치 커피라는 방식은 곧 묻혔을 테고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17세기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장기간의 항해에 더치 커피를 마셨을 가망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니콜로 아페르가 병조림을 발명한 이후에는 장기간의 항해에 더치 커피를 마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다음 내용을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터집니다. 뉴욕 시 하나로 남부 연맹의 공업 생산량에 맞설 수 있다던 북부의 통조림 공장들, 호황을 누릴 기회를 잡게 되죠. 1860년에 5백만개의 통조림이 생산되더니 1865년에는 이게 3천만개가 생산될 정도였고 이미 이 때 통조림에 든 커피와 연유의 혼합물을 물에 타서 먹을 정도가 됩니다. —<2차대전중 전투식량 몇가지>(문제중년)[링크]


 19세기 중반에 원시적인 형태의(?) 인스턴트 커피가 등장해버립니다. 앨런 테일러(Allen Taylor)가 깡통 생산 과정을 기계화하고, 이삭 솔로몬(Isaac Solomon)이 통조림의 열처리 시간을 대폭 줄이는 공정을 개발하는 등의 기술력 발전에 힘입어 통조림은 저렴해졌고 더 흔해졌지요. 가격과 생산성으로 승부하는 통조림 커피가 시장에 나온 상황에서, 값도 비싸고 만드는 데도 오래 걸리는 더치 커피는 금방 밀려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병조림 발명 이후 장기간의 항해에 더치 커피를 마셨으리라 가정하더라도 19세기 중반에 통조림 커피가 등장한 이후 더치 커피가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내어주었으리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병조림 방식의 더치 커피가 19세기 초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19세기 중반에 밀려났을 것이라는 구차한 가정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가정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더치 커피는 17세기 네덜란드 상인 혹은 선원들이 장기간의 항해에 마시기 위해 고안했다고 합니다.


 2) 하지만 선원들은 그들이 마실 물을 나무통에 저장했습니다. 19세기 중반 철제 식수 탱크가 보급되기 전까지는요. 20세기 이전에는 유리병이 비쌌으니 선원들이 마실 더치 커피는 나무통에 저장되었을 것이고, 쉽게 상했을 것입니다.


 3) 부유한 상인들이라면 유리병에 더치 커피를 저장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위생이 문제가 됩니다. 17세기의 지식과 기술력으로는 찬물로 추출한 더치 커피에서 세균이 번식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부패균이 번식한다면 더치 커피는 상할 것이고, 장기간의 항해를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4) 병조림이 발명된 19세기 이후에 더치 커피가 실용화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이미 이렇게 가정하는 순간 1번에서 언급된 더치 커피의 유래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19세기 중반에 통조림 커피가 등장했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가격과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더치 커피는 시장에서 금방 밀려나고 말았겠지요.


 5) 병조림 방식의 더치 커피가 19세기 초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19세기 중반에 밀려났을 것이라는 구차한 가정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가정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장기간의 항해에 더치 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접하면 웃어도 됩니다. 그 때 더치 커피를 나무통에 담았다면 이끼가 둥둥 떠다녔겠고 유리병에 담았다면 곰팡이와 세균이 둥둥 떠다녔을 테니까요. 19세기의 부유한 네덜란드 상인이 병조림 방식의 더치 커피를 가지고 다니며 호사를 누렸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진짜 호사를 누릴 생각이었다면 원두와 추출 도구 일체를 가지고 배에 올라 끼니마다 커피를 끓여 올리라고 했을 테니까요.


 제가 보기에 더치 커피에 붙은 전설(傳說 : 이 문장에서는, '카더라 전하는 썰')은 가격과 생산성으로 승부하는 수많은 커피 관련 상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맛과 향이 좋기는 하지만 꽤 비싼 물건을 팔려면 그럴싸한 이야기로 유혹할 필요가 있었을 테니까요. 예멘 모카 마타리를 비싸게 팔기 위해 '세계 3대 커피'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고흐가 좋아한 커피'라는 전설을 붙였듯이 말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정말 더치 커피를 마셨다는 믿을 만한 1차 자료가 발견된다면 저는 이 글의 내용을 철회해야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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