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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제품의 명칭은 '그랏토'입니다. 나름대로의 뜻이 담긴[각주:1] 우리말 이름이죠. Grotto는 또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는[각주:2] 영어 이름입니다. 둘은 임의로 짝지어졌을 뿐이죠. 따라서 Grotto를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쓰면 '그로토'가 되므로 한글 표기가 올바르지 않다거나, '그랏토'를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맞게 쓰면 'Gratto'가 되므로 로마자 표기가 올바르지 않다는 식의 논의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카누 70봉지 패키지에 딸려온 텀블러를 2년 넘게 잘 쓰면서도 텀블러 욕심이 자꾸 났습니다. 보온병 수집가의 기질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사용중인 조지루시 ESE-35의 보온 능력과 밀폐 성능에는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텀블러는 그저 예쁘고 쓰기에 편하면 좋겠다 싶었지요. 스타벅스의 리저브 블랙 루시 텀블러가 참 예뻤는데, 뚜껑에 박힌 패킹이 설거지하기 까다로운 형태를 하고 있었고 중국산 주제에 가격 또한 너무 높아서 후보에서 빼 버렸습니다.[각주:3] 그 뒤로는 눈에 들어오는 텀블러가 없더군요.


 그리고 단짝에게 이 텀블러를 선물받았습니다. 제가 원하던 거의 모든 사양을 갖춘 제품이었습니다. 굴곡이 예쁘게 들어간 외관, 사실상 밀폐가 되는 뚜껑, 진공 이중벽 단열 구조[각주:4], 원터치로 열리는 뚜껑, 뚜껑이 의도치 않게 열리는 일을 막아주는 뚜껑덮개, 분리하기 편한 패킹, 미끄럼 방지 바닥까지! 세상에 이런 물건이 다 있었나 싶을 정도였지요.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너무 완벽하면 재미없잖습니까? 그럼 그랏토 R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이 많으니, 더보기 안에 내용을 담도록 하겠습니다.



 뚜껑과 몸통의 주둥이 쪽에 새겨진 나사산의 특징과, 뚜껑 자체의 밀폐력이 좋다는 특징이 함께 작용하면 의외의 결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뜨거운 액체를 담고 텀블러를 뒤집으면 뚜껑이 뿜!! 하고 날아갑니다. 액체는 당연히 콸콸 쏟아져나오고요. 허허허(…) 새로 산 텀블러를 뚜껑까지 열탕소독하려다 이런 일을 당했는데, 텀블러를 흔들던 중이었다면 뜨거운 물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랏토 R에 뜨거운 음료를 담았다면 가방 안에서 텀블러가 넘어지거나 뒤집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가방 속에서 커피잔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역시 뚜껑을 열탕소독하다가 겪은 일입니다만, 뜨거운 액체를 담고 음용구 뚜껑을 연 다음 텀블러를 90도 정도로 기울이면 분수처럼 액체가 뿜어져나옵니다. 다음 007 시리즈에 등장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비밀병기입니다. 그랏토 R에 뜨거운 음료를 담았다면, 음용구 뚜껑을 처음 열고 마실 때 너무 급히 기울이지 마세요. 뜨거운 음료가 얼굴 위로 쏟아져 화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일은 일반적인 음용 상황에서 거의 벌어지지 않는 일이니 이승탈출 넘버원급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뜨거운 물을 채우고 뒤집거나, 뜨거운 물을 채우고 90도로 기울이는 상황에서 괜찮을 텀블러는 사실상 없을 테니까요.




 텀블러에 뜨거운 음료를 담았을 때는 음용구 뚜껑을 한 번 열어 압력이 높아진 공기를 빼줄 필요가 있습니다. 텀블러에 담은 음료를 마실 때는 조금씩 기울여 마시는 게 좋고요.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텀블러의 밀폐력은 똑바로 세워놓았을 때 텀블러 안에서 출렁거리는 액체가 새어나오지 않게 하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편합니다. 텀블러가 넘어지거나 뒤집어지면 액체가 새어나오거나 뚜껑이 열려버릴 수도 있거든요.[각주:6] 이는 '완전밀폐 텀블러'라는 수식어가 붙은 모든 텀블러에 적용되는 사항입니다.


 그랏토 R의 뚜껑 측면에는 돌기가 있어서, 음용구를 연 상태에서도 손에 힘을 주어 뚜껑을 돌려 닫기 편합니다. 음용구를 닫은 상태로 뚜껑을 돌려 닫은 다음 음용구를 열어 공기를 빼는 것보다, 음용구를 연 상태로 뚜껑을 돌려 닫은 다음 몇 분 내버려두어 공기를 빼는 게 좀 더 편했습니다.




 다른 텀블러를 사용하는 정도의 평범한(?) 주의를 기울이면 뜨거운 커피도 안전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 처음 사용할 때는 조금 무서웠습니다만(이 비밀병기가 저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의외로 무난했습니다. 적당히 기울이면 한 모금 마실 만큼의 음료가 나와서 편하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보온 능력은 정말 탁월해서, 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텀블러 안에 있던 커피의 절반은 두 시간 전에 마셔버린 뒤였는데도 말이지요.[각주:7] 밀폐 능력도 상당히 좋아서, 텀블러를 똑바로 세운 상태에서 손가방에 넣고 네 시간쯤 걸어다니는 동안 한 방울도 새지 않았습니다. (카누 텀블러를 가방에 넣을 때는 뚜껑 위에 못 쓰는 손수건을 덮고 고무줄로 묶어야 했습니다. 가방 안에서 찰랑거리면 몇 방울씩 샐 때가 많아서요)


 뜨거운 음료를 담은 텀블러의 뚜껑을 만지면 꽤 따뜻합니다. 열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리죠. 뭐라도 한 겹 덮어주면 훨씬 나을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보온병 주머니는 이 텀블러의 뚜껑을 감싸줄 정도로 길지는 않아서, 적당한 헝겊 덮개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주둥이의 폭이 좁아서 설거지할 때 텀블러 바닥까지 손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젖병 닦는 스폰지를 사용하면 비교적 쉽게 닦을 수 있고, 집게로 수세미를 집어 밀어넣는 수도 있습니다. 뚜껑의 나사산이 상당히 촘촘하고 깊게 파여 있기 때문에 깔끔하게 닦으려면 공을 좀 들여야 합니다. 쓰다 보면 커피 물이 드는데,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게 속 편합니다. 뺄 방법이 마땅찮거든요.




 <보온병 수집가의 보온병 이야기 [2]>에서 저는 '완벽한 텀블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입구가 넓어 휘핑크림 올리기 좋고 스팀 치기도 편하면서, 뚜껑을 쉽게 여닫을 수 있고 완전히 밀폐가 되는 동시에 보온 성능까지 좋은 텀블러는… 2050년쯤에는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 글의 원고는 9월 초에 거의 완성되어 있었고, 9월 22일 쯤 그랏토 R을 받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표현에 손을 대지는 않았습니다(손을 댔다면 기승전그랏토가 되었겠죠). 그랏토 R은 텀블러의 편리함과 보온병에 가까운 보온 성능을 한 몸에 갖춘 매우 우수한 제품이고, '완벽에 가까운 텀블러'입니다.[각주:8] 스타벅스에 갈 때마다 MD 코너를 기웃거리고 백화점에 갈 때마다 보온병·텀블러 코너를 둘러보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습니다만(ㅋㅋㅋㅋㅋ) 텀블러 욕심을 부릴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 마음에 딱 드는 텀블러를 갖고 있으니까요.




 각주


  1. 그릇+아토('선물'의 순우리말) [본문으로]
  2. '작은 동굴', 음식을 보관하는 장소 [본문으로]
  3. 중국산이 무조건 싸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잘 만들면 비싼 값을 받아도 되지요. 하지만 스타벅스의 리저브 블랙 루시 텀블러는 보온력이 탁월한 것도 아니고, 뚜껑이 완전밀폐인 것도 아니고, 쓰다 보면 칠도 벗겨지는, 말 그대로 흔한_대륙의_텀블러.$$$입니다. 이게 3만 원이 넘으니… 텀블러 쿠폰으로 마실 수 있는 음료 값을 고려해도 가격이 너무 높습니다. [본문으로]
  4. 이중벽 구조 텀블러는 흔하지만 진공 이중벽 구조임을 명시하는 텀블러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진공 이중벽 구조면 보온병에 가까운 사양이죠. [본문으로]
  5. 텀블러나 보온병에서 가장 열이 많이 빠져나가는 곳은 보통 뚜껑입니다. 뚜껑에 뭐라도 한 겹 덮어놓으면 열이 좀 덜 빠져나가겠지요. [본문으로]
  6. 다만, 압력이 높아진 공기를 뺀 다음 뚜껑을 닫았고, 안에 담긴 음료가 조금 식어 내부 공기의 온도가 내려가고 그에 따라 내부 압력 또한 낮아진 상태라면, 텀블러가 조금 기울거나 넘어지더라도 텀블러 바깥의 공기가 양압(陽壓)으로 작용해 액체가 새어나오거나 뚜껑이 열리는 것을 막아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원론적인 서술일 뿐, 양압을 이겨내고 액체가 새어나오거나 뚜껑이 열리는 일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7. 단, 커피를 담기 전 텀블러를 예열하고, 텀블러를 보온병 주머니로 감싸서 단열 처리를 한 상태였습니다. 좀 더 '공을 들인' 사용 환경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텀블러라면, 똑같은 공을 들이더라도 그랏토 R만큼 온도를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저의 경험으로 확인한 사항입니다) [본문으로]
  8. 뚜껑에 뚫린 음용구와 패킹의 마감이 다소 미흡하고('지느러미'가 좀 남아 있었습니다) 뜨거운 물을 채우고 뒤집으면 비밀병기가 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어 '완벽한 텀블러'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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