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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팅 정도를 표현하는 말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통용되는 것이 라이트-시나몬-미디엄-하이-시티-풀시티-프렌치-이탤리언의 8단계입니다. 외국의 문서를 읽다 보면 New England(라이트 정도), Viennese(풀시티 정도), Turkish, Neapolitan, Spanish(앞의 셋 모두 프렌치~이탤리언 정도)와 같은 표현도 접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커피 생활을 하는 동안 구입하는, 에스프레소용이 아닌 원두의 로스팅 정도는 사실상 5개 단계—미디엄, 하이, 시티, 풀시티, 프렌치의 범위 안에 있게 마련이고 그나마도 미디엄과 프렌치는 드물어서 대부분의 로스팅은 하이에서 풀시티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 시티, 풀시티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탓인지('도시 볶음'이라면 대체 콩을 얼마나 볶았다는 거죠?) 약볶음/중볶음/강볶음, 약배전/중배전/강배전이라는 표현을 대신 쓰기도 합니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약볶음'과 같은 표현 대신 '약배전'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중배전을 세분화하여 중약/중/중강으로 나누기도 하고요. 그런데 미디엄~프렌치의 5단계와는 달리 약-(약중)-중약-중-중강-강-(초강)의 5~7단계는 중구난방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이 로스터리에서는 중배전을 시티로 잡는데, 저 로스터리에서는 중배전을 시티 후반으로 잡는 식으로 말입니다.




 로스팅 중의 '크랙'을 기준으로 미디엄~이탤리언의 6개 단계를 정의하면, 각 단계는 다음과 같은 로스팅 정도를 가리키게 됩니다.[각주:1] 이 정의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편의상 이 글에서는 이 정의를 따라 글을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디엄 : 첫 번째 크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크랙이 끝날 때의 시점까지 로스팅한 것.

하이 : 두 번째 크랙 직전까지의 로스팅.

시티 : 두 번째 크랙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몇 초 더 지난 시점.

풀시티 : 두 번째 크랙이 한창 진행되는 시점.

프렌치 : 두 번째 크랙의 절정에서 몇 초 더 지난 시점.

이탤리언 : 두 번째 크랙이 끝난 시점으로 로스팅의 한계.


 이론에 무게를 두는 경우에는 라이트, 시나몬을 약배전으로 잡고 미디엄부터를 중배전으로 잡습니다. 호리구치 토시히데의 <커피 교과서>, 일본 책을 베껴서 만들다시피 한 <커피의 거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은 경우죠. 커피 잡지 <Roast>의 2010년 기사 "Saying Coffee"에서는 Medium-light(9단계 중 4단계)에 'Light-Medium', Medium brown(9단계 중 5단계)에 'Medium'과 'Regular City'를 넣었으니 여기에서도 미디엄을 중배전으로 잡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로스터리에서 원두를 라이트나 시나몬으로 볶는 경우는 사실상 없습니다. 제가 한 때 인터넷 원두 판매자의 제품별 로스팅 정도를 조사해서 수집한 적이 있는데, 조사 대상 12개 로스터리의 173종 제품 중에서 라이트나 시나몬으로 볶았다는 제품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각주:2] (참고로 미디엄은 5종[각주:3], 프렌치는 2종[각주:4]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하이, 시티, 풀시티 및 하이~시티 사이, 시티~풀시티 사이로 볶은 제품들이었습니다)


 현실이 이러하므로, 로스터리에서 이론대로 미디엄부터 중배전으로 잡으면 약배전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어져버립니다. 카레 전문점 메뉴판에 '약간 매운 맛', '매운 맛', '아주 매운 맛'만 있는 상황 같은 거죠. "순한 맛은 없어요?" "없습니다 고객님ㅠㅠ" 뭐 이런 카레집이 다 있냐는 핀잔을 듣기 싫다면, '우리 가게 제품 중에서 가장 순한 제품은 그냥 순한 맛이라고 메뉴판에 올리자. 순한 맛이 왜 매콤하냐고 물으면, 그야 카레는 원래 매콤한 거니까…' 하면 됩니다. 로스터리도 비슷한 상황이겠지요.


 이 때문에 이론보다는 실전, 그러니까 장사에 무게를 두는 경우에는 미디엄을 약배전으로 잡습니다. 전광수커피하우스는 미디엄[각주:5]에서 하이[각주:6]를 '약 볶음', 시티[각주:7]에서 풀시티[각주:8]를 '중 볶음', 프렌치[각주:9][각주:10]를 '강 볶음'으로 보는 것 같은데, 과테말라 안티구아[각주:11]와 콜롬비아 수프리모[각주:12]는 프렌치를 '중강 볶음'으로 보는 식의 예외가 있습니다. '약 볶음'을 약 볶음 1번 포인트와 약 볶음 2번 포인트로 나누기도 하는데[각주:13], 중 볶음과 중강 볶음을 나누는 문제는 위의 예외 사항과 얽혀서 조금 복잡해집니다.


 로스트마스터 자격증을 운영하는 사단법인 한국커피협회에서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로스트마스터>[각주:14]를 보면 p.110에서는 미디엄이 '약볶음', 하이가 '중약볶음', 시티가 '중볶음', 풀시티가 '중강볶음', 프렌치가 '강볶음'인데, p.215에서는 미디엄이 '중볶음에서 약하게 볶은 것', 하이가 '중볶음에서 약간 강하게 볶은 것', 시티가 '중볶음에서 강하게 볶은 것', 풀시티가 '약간 강볶음', 프렌치가 '강볶음'으로 미디엄~시티 구간의 표현이 상당히 다릅니다. 저자가 여럿인데 각자가 작성한 부분들 사이에 충돌하는 내용은 없는지 검토하는 과정을 생략해버렸나 봅니다. 출처를 명시한(즉 인용된) 자료들이었다면 '어느 자료의 저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또 다른 자료의 저자는 저렇게 생각하나보다' 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각주:15]




 일본 쪽에서 건너온 이론에 따르면 시티 로스트는 중배전 중 강한 쪽[각주:16] 내지 강배전 중 약한 쪽[각주:17]이 됩니다. 반면 서양 잡지 <Roast>를 참조하면 시티는 중배전의 한가운데[각주:18]가 됩니다. SCAA는 SCAA Tile #55(Agtron 60-50)를 Medium에 해당하는 로스트 컬러로 보며 이는 시티에 해당합니다.[각주:19]


 시티 로스트는 중배전일까요? 더 나아가, 약배전/중배전/강배전은 각각 어느 정도의 로스팅 단계를 포함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간단히 답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미디엄~이탤리언의 6개 단계[각주:20]는 로스팅 중의 '크랙'을 기준으로 정의한 것이고, SCAA Tile이나 Agtron Scale의 Light/Medium/Dark및 그것을 세분한 단계들은 볶은 원두의 색깔[각주:21]을 기준으로 정의한 것이고, 원두 판매자의 약볶음/중볶음/강볶음은 가게에서 팔리는 제품들 사이에서 해당 제품이 차지하는 위치[각주:22]를 기준으로 정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기준이 다르니 각자가 생각하는 약배전/중배전/강배전도 달라질 수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시티를 중배전, 풀시티를 강배전, 미디엄~하이 정도를 약배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 약배전/중배전/강배전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이러한 로스팅 정도를 가리킨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당분간은 "시티 로스트는 중배전이다", "시티 로스트는 중배전으로 불러야 한다"와 같은 통일안이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각자 어림잡은 대로 중배전이니 강배전이니 하겠지요. 소비자도 그에 따라 어림을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각주


  1. 호리구치 토시히데 지음, 윤선해 옮김 <커피 교과서> (2012) 달. p.87 [본문으로]
  2. 이 때 조사했던 로스터리는 버니빈, 카페뮤제오(개편 전), 로스터스빈, 남스로스터리, 짐마카페, 그라나다카페, 커피콩닷컴, 하나커피빈, 로스팅하우스, 왕싼커피, 어라운지, 게포커피였습니다. 편의상 '주요 산지'로 추린 28곳에 한해 조사했으니 마이너한 산지 몇 곳은 이 숫자에서 빠져 있습니다. [본문으로]
  3. 로스터스빈에서 2종(이르가체페, 시다모), 어라운지에서 3종(이르가체페, 시다모, 르완다). 따로 표를 만들어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자블럼코리아의 블루마운틴도 미디엄으로 볶습니다. 이 사례를 추가하면 미디엄으로 볶은 제품은 174종 중 6종이 됩니다. [본문으로]
  4. 그라나다커피에서 1종(케냐), 게포커피에서 1종(케냐). 좀 애매한 것으로 Full city~French가 1종(짐마카페의 멕시코), High~French(…)가 1종(버니빈의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이 있는데 이 사례를 추가하면 173종 중 4종이 됩니다. [본문으로]
  5. 전광수 (2013) <전광수의 로스팅 교과서> 달. p.46 (1차 크랙 시작부터 종료까지) [본문으로]
  6. 위의 책, p.135 (엘살바도르 에베레스트, 그래프의 ⑤지점-2차 크랙 직전) 이 대목 외에도 1차 크랙 시작 후부터 2차 크랙 시작 전까지를 '약 볶음'으로 잡은 표현이 많습니다. [본문으로]
  7. 위의 책, p.86.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그래프의 C지점-2차 크랙이 시작되어서 정점까지의 포인트) [본문으로]
  8. 위의 책, p.117 (케냐 AA, 그래프의 ④지점-2차 크랙의 정점) [본문으로]
  9. 위의 책, p.153 (코스타리카 타라주, 그래프의 ⑤지점-2차 크랙의 정점을 지나 오일이 비치는 시점) [본문으로]
  10. 위의 책, p.117 (케냐 AA, 그래프의 ⑥지점-2차 크랙의 정점을 지나 오일이 비치고, 거기서 조금 더 지난 지점) [본문으로]
  11. 위의 책, p.172 (과테말라 안티구아, 그래프의 ⑦지점-2차 크랙의 정점을 지나 오일이 비치고, 거기서 조금 더 지난 지점) [본문으로]
  12. 위의 책, p.189 (콜롬비아 수프리모, 그래프의 ⑥지점-2차 크랙의 정점을 지나 오일이 비치고, 거기서 조금 더 지난 지점) [본문으로]
  13. 위의 책, p.153 (코스타리카 타라주. 약 볶음 1번은 1차 크랙 종료, 2번은 2차 크랙이 막 시작하였을 때로 각각 미디엄, 하이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14. (사)한국커피협회 (2013) <로스트마스터> (주)커피투데이. [본문으로]
  15. 이 외에도 이 책의 문제점 몇 가지를 더 지적할 수 있습니다. 커피의 결점 Hidey를 '숨은 맛', concerned가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심사위원의 부정행위가 의심될 때, 해당 사건에) 관계되는 WCRC 심사위원(들)…을 모두 모아 문제에 대해 평가한다"로 번역했어야 마땅할 문장을 "걱정스러운 WCRC 심사위원(들)…을 모두 모아 문제에 대해 평가한다"으로 옮기는 등의 오역이 있습니다. 원고를 재검토하면서 뭔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봅니다. 제가 예전에 "스페셜티 커피와 COE 커피[1]"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SCAA와 COE의 등급 매기기와 관련된 낡거나 잘못된 자료가 실린 것도 있고요(SCAA 기준은 2009년에 개정되었는데 이 책은 2013년에 출판된 것이 예전 자료를 그대로 싣고 있습니다. COE 평가 기준에 80점 이상이면 Specialty, 79점 이하면 Commercial, 75점 이하면 Exchange, 등외는 Triage라는 자료가 올라왔는데… 블로그 포스팅에서 누군가가 퍼온 자료의 형태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COE 홈페이지 프로토콜에서는 본 적이 없는, 의심스러운 자료입니다). [본문으로]
  16. 하보숙·조미라 (2010) <커피의 거의 모든 것> 열린세상. pp.38-39 (이 책에는 '중 로스팅'에 미디엄, 하이, 시티를 넣었습니다. 시티는 '중 로스팅'의 세 단계 중 강한 쪽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본문으로]
  17. 호리구치 토시히데 지음, 윤선해 옮김 <커피 교과서> (2012) 달. p.87 (이 책은 시티를 '약한 강배전'으로 봅니다) [본문으로]
  18. . 총 10단계로 분류한 로스트 컬러 중 Medium brown을 가리키는 'Common Names'중 하나로 Regular City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Medium-dark brown에는 Full City가 자리합니다) 해당 문서에서 중배전쯤으로 볼 수 있는 로스트 컬러는 Medium-light brown, Medium Brown, Medium-dark brown이고, Medium Brown은 이 세 단계 중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따라서 해당 문서는 시티를 '중배전의 한가운데'로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본문으로]
  19. <로스트마스터>에서 시티를 중볶음으로 취급하느냐 중강볶음으로 보느냐를 두고 한 권의 책에서 두 가지 의견을 제시하는 문제는 있지만, 두 가지 의견 모두 SCAA Tile #55를 시티 로스트로 보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0. 우리나라에서 많이 통용되는 것은 라이트~이탤리언의 8단계지만, 라이트와 시나몬은 모두 1차 크랙 전이라 크랙을 기준으로 정의하거나 구분할 수 없고 원두의 색깔과 냄새, 로스팅 시간과 온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실상 쓰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문장에서는 라이트와 시나몬을 뺐습니다. [본문으로]
  21. 숫자가 작아질수록 원두의 색깔이 짙고(=어둡고), 로스팅이 많이 진행된 것입니다. 대략적인 수치는 아주 살짝 볶았을 때 95, 시티가 55, 풀시티가 45, 아주 짙게 볶았을 때 25입니다. [본문으로]
  22. 미디엄~풀시티 범위에서 원두를 로스팅해 판매한다면 미디엄에는 약볶음, 풀시티에는 강볶음이라는 표현을 쓰겠지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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