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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중배전을 좋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강배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2013 카페&베이커리 페어에서 구입한 케냐 AA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뜨거운 물로 추출해 금방 마시기에는 너무 강하고 자극적이었기 때문이죠. (블렌딩이란 것에 처음 도전한 계기도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 된 셈입니다)


 그러다가 유리 약탕기로 커피를 빨리 식히는 방법을 고안해 뜨거운 물로 추출한 커피를 차게 식혀 보관해 마시게 되면서 조금씩 강배전이 그리워졌습니다. 약배전이나 중배전에 해당하는 원두로 추출한 커피는 차게 식혀 마실 때 밋밋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얼마 전 주문한 풀시티[각주:1] 탄자니아는 뜨거운 물로 추출해 금방 마셔도, 차게 식혀 마셔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풀시티를 다시 보게 된 계기였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강배전도 잘만 하면 맛있는 커피가 됩니다. 그럼 '잘 된 강배전'이란 무엇일까요? 그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한동안 저에게 주어진 탐구 주제였습니다.


 잘 된 강배전의 조건에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기분 좋은 쌉쌀함][+복합적인 맛][-탄맛][-탄내][-쩐내] 정도를 듭니다. 로스팅 포인트를 잘 잡는다면 탄내나 탄맛이 날 때까지 원두를 볶지는 않을 테고 로스팅 중 배기가 잘 된다면 쩐내는 나지 않겠지요. 그 다음이 기분 좋은 쌉쌀함과 복합적인 맛인데…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로스팅이 잘 된 풀시티 원두로 잘 추출한 커피에서는 기분 좋은 쌉쌀함과 복합적인 맛이 느껴지고, 풀시티 원두로 잘 추출한 커피에서 기분 좋은 쌉쌀함과 복합적인 맛이 느껴진다면 그 풀시티 로스팅은 잘 된 것입니다. 일종의 순환논리죠.




 그러다 <스페셜티 커피대전>[각주:2]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보고 이 순환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이 쓴맛 물질은 크게 두 가지 그룹으로 분류되며 커피의 쓴맛을 이루는 핵심을 이룬다고 단베 씨[각주:3]는 말한다.


 ① 클로로겐산류 그 자체에서 생성되는 클로로겐산 락톤류

 ② 카페산에서 발생하는 비닐카테콜 중합체


 (중략) 쓴맛에도 '좋은 쓴맛'과 '좋지 않은 쓴맛'이 있으며 ①이 커피다운 좋은 쓴맛이고 ②가 새까맣게 탄 밥을 떠올리게 하는 '좋지 않은 쓴맛'일 것이다.


 (중략) 생두의 수분이 적은 상태에서 가열하면 '탈수반응(물 분자 하나를 잃는다)'이 이루어져 좋은 쓴맛의 클로로겐산 락톤류가 생성된다. 그러나 클로로겐산류는 가열하면 '퀸산'과 '카페산'으로 분해된다. 이 카페산이 다시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생성되는 것이 ②의 '좋지 않은 쓴맛', 즉 비닐카테콜 중합체다. 이 쓴맛 물질은 클로로겐산 락톤류와 마찬가지로 카페인의 10~20배의 쓴맛을 지닌다고 알려져 있으며, 강하게 볶은 에스프레소의 쓴맛과 비슷하다.


— <스페셜티 커피대전>[각주:4]


 다만 클로로겐산류에서 나오는 쓴맛은 떫은 맛도 동시에 내므로 농도가 높으면 오히려 맛이 나빠진다[각주:5]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만 읽고 클로로겐산류는 좋은 것, 비닐카테콜 중합체는 나쁜 것 하는 식으로 간단히 재단할 수 없는 것이죠.


 위 인용문의 가치는 '영혼 없는 쓴 맛'이라는 다분히 주관적인 표현을, '클로로겐산 락톤류에 비해 비닐카테콜 중합체가 지나치게 많다'와 같이 어느 정도 객관화할 수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상대적으로 연금술에 가깝던 로스팅을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낼 열쇠가 되어줄 수도 있고요.


 클로로겐산류-비닐카테콜 중합체의 관계를 중시하여 기분 좋은 쌉쌀함에 대해 설명하자면 '비닐카테콜 중합체의 비율이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을 수준으로 적당하고, 클로로겐산류가 어느 정도 남아 있어 커피다운 쌉쌀함을 내는 것'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앞서 말한 [-탄내][-쩐내]와 같은 조건까지 만족한다면 비로소 '잘 된 강배전'이 될 테고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매운 음식(불닭, 불족발, 매운갈비찜…)이나 MSG가 그 자체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지 않은 재료의 맛을 감출 의도로 매운 맛을 내는 행위, 좋지 않은 음식의 맛을 감출 의도로 MSG를 들이붓는 행위가 상도의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부도덕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원두의 강배전도 이와 비슷합니다. 좋지 않은 생두의 특성을 감출 의도로, 또는 로스터의 서투른 솜씨를 감출 의도로 그냥 강하게 볶는 행위는 부도덕합니다. 속임수죠. 하지만 이런 속임수를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모든 강배전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은 속임수로써의 강배전일 뿐, '잘 된 강배전'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생두의 특성을 잘 살려내려면 무조건 약배전을 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미디엄 로스트 안티구아나 하이 로스트 만델링을 사실상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강배전할 때 제맛을 내는 생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 생두라면 강배전하는 게 좋은 선택이겠지요.


 좋은 생두를 솜씨 있게 볶은 강배전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제품이 인정받고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면 커피 애호가로서는 아주 좋은 일이겠지요. 지금 당장 내가 추출한 커피에 클로로겐산류와 비닐카테콜 중합체가 얼마나 녹았는지 측정하기는 힘들겠지만[각주:6], 적어도 취향이니 호불호니 하는 무책임한[각주:7] 표현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지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세워 '기분 좋은 쌉쌀함'의 가치를 옹호할 수 있고, 나아가 '잘 된 강배전'의 가치를 옹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한동안은 강배전 원두를 많이 찾게 될 것 같습니다. 여름에는 쌉쌀하고 시원한 커피가 제 맛이니까요!




 각주


  1. 저는 개인적으로 풀시티를 강배전으로 분류합니다. 프렌치 로스트를 한 원두를 거의 주문하지 않으니까요. [본문으로]
  2. 다구치 마모루 지음, 박이추·유필문·이정기 공역 (2013) <스페셜티 커피대전> 광문각. [본문으로]
  3. 원서의 저자 다구치 마모루 씨의 벗 단베 유키히로 씨. 인기 사이트 '백가원(百珈苑)'을 운영하며, 커피의 미각 생물학에 정통한 시가의과대학의 의학박사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4. 위의 책, pp.117-119(요약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 위의 책, pp.117-119(요약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6. 언젠가 이야기했던 HPLC정도는 있어야 제대로 측정할 수 있을 겁니다. [본문으로]
  7. 리뷰어로서 리뷰할 때나 애호가로서 무언가를 논할 때, '취향'이나 '호불호'를 방패 삼는 일은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취향에 달린 문제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와 같은 말은 어떤 사항도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의 낭비입니다. 무언가를 명확하게 단정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고 때로는 위험하지만, 리뷰어라면 그러한 고난은 견뎌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왜 리뷰를 찾는지 생각해본다면 말이지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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