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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은 좋은 경험입니다. 하지만 커피 애호가에게는 '그럼 거기 있는 동안 커피는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거리를 던져주지요. (ㅋㅋㅋㅋㅋ) 이런저런 회사에서 나오는 온갖 아웃도어용 커피 추출 도구들을 보면, 커피를 마시겠다는 인간의 집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올 봄 전남 쪽에 내려갈 때는 프리미엄 스틱커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아서 커피 추출 도구를 싸들고 가기로 했습니다. 나름대로는 가장 간단하게 짐을 꾸릴 생각으로 텀블러, 차망, 실리트 페퍼밀과 원두를 챙겼습니다. 텀블러와 차망으로 추출하는 티포트 브루 커피의 변법을 쓸 생각이었죠.


 장비를 늘리는 재미 중 하나는 '장비 A가 있으면 활동 a를 할 수 있다'는 점일 겁니다. 그 재미는 저도 잘 알기 때문에(…) 여행을 핑계 삼아 아웃도어용(또는 여행지용) 커피 추출 도구를 하나 들일까도 생각했습니다. 에스프레소나 모카포트의 원리를 이용한 아기자기한 제품들이 꽤 많았습니다. 사고 싶은 것들도 몇 종류 있었고요. 에스프레소나 모카포트는 압력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데, 압력이 걸리는 제품에는 개스킷이 필요하고, 개스킷은 필연적으로 낡게 마련이며, 앞서 살펴본 틈새 상품 내지 아이디어 상품의 경우 개스킷이 낡을 때쯤 제품이 단종되어 유지보수를 할 길이 없어지거나 회사 째로 망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니 안 되겠다 싶어 구입 계획을 접어버렸습니다. 유지보수에 유난히 집착하는 게 좀 별스러운 성미긴 하지만 지름신을 쫓아내는 데 도움이 될 때가 많아서 앞으로도 이 성미를 고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 장비를 사는 건 그만두고 텀블러와 차망 등을 챙겨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커피 추출이 끝나고 장비를 닦는 것은 귀찮은 일이며, 말리는 것은 더 귀찮다는 점을 체험했습니다. 펜션의 허술한 건조대에 조그마한 부품들을 걸쳐놓고 말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집에서의 30분과 여행지에서의 30분은 그 가치가 다르다는 것도 새삼 느꼈습니다. 텀블러를 씻고 페퍼밀을 솔질하느라 늦어진 30분 사이 기온이 달아올라 고생을 하기도 하고, 날이 완전히 저물어 산책 시간을 놓치기도 했거든요. 상대적으로 여유가 많은 일몰 후에 커피 한 잔을 내려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꽤 기분 좋고 아늑한 일이었습니다. 커피를 늦게 마셔서 잠이 잘 안 오는 바람에 곧 그만두었지만요(아이고…orz).


 몇 번 고생을 하고 나서 다음에는 프리미엄 스틱커피를 챙겨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주도에 다녀올 일이 생겼을 때 카누, 루카, 네스카페 수프리모 크레마를 챙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원할 때 물만 끓여 부으면 되고 마시고 나서 컵만 씻으면 되는 그 간편함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프리미엄 스틱커피도 잘만 추출하면(<이 글>에 요령 몇 가지를 정리해 놓았습니다) 꽤 괜찮은 맛을 내어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에 정답은 없습니다. 추출 도구를 챙겨 나가 여행지에서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는 재미에도 가치는 존재하니까요(괜히 기호품이고 취미 생활이겠습니까?). 저는 그 가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겨울 밤거리의 추위가 캔커피를 맛있게 해 주고, MT 이튿날 아침의 엉망진창인 숙소가 라면을 맛있게 해 주듯, 여행이라는 환경이 인스턴트 커피를 맛있게 해 줌을—그리고 여기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프리미엄 스틱커피를 천천히 홀짝이며 카누가 루카보다 낫네, 같은 생각을 할 여유도 있어서 좋고요. 평소라면 돈 주고 사지 않을, 한 봉에 천 원이 넘어가는 커피 체인점의 인스턴트 커피가 빛을 발할 수 있는 곳도 아마 여행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 번 여행을 떠날 때는 스타벅스 비아를 사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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