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예전 글 <가격대 성능비의 함정, 그리고 '한 방에 가기'>에서, 저는 '한 방에 가기'를 조건부 지지하면서 다음 조건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 오래 쓸 게 확실하다면.

 -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 중 가장 저렴한 축에 든다면.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틀린 데가 없는 조건들이지만 아주 추상적이지요. 오래 쓸 게 확실한지,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 중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당시에는 판단이 서지 않아 그쯤에서 글을 마무리지었습니다만, 영기준예산(ZBB, Zero-Base Budgeting)의 의사결정패키지라는 것을 얼마 전 알게 되었고 이거다 싶어 후속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덕질하는 데 쓸모가 있나 봅니다.




 편의상 다음 상황을 가정하겠습니다. 당신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한 대 사고 싶고, 그에 맞게 전동 그라인더도 함께 구입하고자 합니다. 무엇을 사는 게 좋을까요? 가성비 좋은 물건? 저번에 살펴본 대로 가성비는 제품 평가 기준으로 쓸 수는 있어도 제품 구입의 타당성이나 구입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쓰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영기준예산의 의사결정패키지를 변형하여 이 상황에 적용하면, 가성비를 따르는 것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에스프레소 머신 + 전동 그라인더를 세트로 구입한다고 가정하고, 다음 세 가지 수준의 대안을 만듭니다.[각주:1] 편의상 내가 에스프레소 머신을 원하는 것이 확실하다고(즉, 구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찬장에 던져넣지는 않을 거라고) 가정하겠습니다.


 1.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값싼 대안

 2. 현재 예산 범위 내에서 최선인 대안

 3. 예산의 제한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최선인 대안


 저라면 1안에는 필립스 HD8325와 (영점조절을 한) 바라짜 엔코를 놓겠습니다. 합쳐서 40만 원쯤 하겠군요. 3안에는 유라(Jura)의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인 Ena Micro Easy를 놓겠습니다. 로젠상사 정가가 198만 원이네요(좀 더 싸게 파는 곳은 있습니다). 2안은, 현재 예산이 100만 원쯤 된다고 가정하고 아스카소 베이직과 아스카소 i-mini 베이직을 놓겠습니다.


 1. 필립스 HD8325 + 바라짜 엔코 (약 40만 원)

 2. 아스카소 베이직 + 아스카소 i-mini 베이직 (약 100만 원)

 3. Jura Ena Micro Easy (198만 원-정가)


 우선 3안을 검토합니다. 내가 Ena Micro Easy를 최선이라 생각한 이유는?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이어서 사용하기 편하고, 자가 세정 기능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관리하기 편하며,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고 2안으로 넘어갑니다. 현재 예산에 맞는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을 고려하지 않고 굳이 그라인더와 반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의 조합을 꾸민 까닭은? 전자동보다는 반자동이 맛이 좀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다음 질문—1안보다는 2안이 맛이 좋을까?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안의 우선순위는 1안보다는 앞에 오게 되므로, 1안을 검토할 필요는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이제 2안과 3안 사이에서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 다음 질문—2안을 위와 같이 구성한 이유는 '맛'이라는 기준에서였는데, 2안은 내가 원하는 수준의 맛을 내어줄 수 있을까? 또는, 2안을 사면 나는 맛 때문에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란실리오 록키+미스 실비아 조합이 탐이 나거든요. 좀 비쌉니다. 그렇다면 2.7안쯤 될 대안(란실리오 록키+미스 실비아)의 우선순위는 2안보다 앞에 오게 됩니다.


 3안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다음 질문—3안을 위와 같이 구성한 이유는 '편리함과 맛'이라는 기준에서였는데, 3안은 내가 원하는 수준의 편리함과 맛을 내어줄 수 있을까? 또는, 3안을 사면 나는 편리함이나 맛 때문에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될까?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3안보다 싼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 중에 좋은 것을 골라서 산다면, 그래도 3안이 사고 싶을까? 밀리타(Mellita) 카페오 솔로 정도라면 그럭저럭 쓸만하겠지만 그래도 Ena Micro Easy가 생각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1.5안쯤 될 대안(밀리타 카페오 솔로는 100만 원 아래입니다)의 우선순위는 3안보다는 뒤에 오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3안(Ena Micro Easy)과 2.7안(록키+실비아)이 높은 우선순위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편리함을 고려하면 3안이, 맛에 집중한다면 2.7안이 좀 더 매력적인 대안이지요. 둘 다 현재 예산인 100만 원을 아득하게 초과하지만, 지금까지 던진 질문과 그 답변의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한 방에 갈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각자의 기준('편리함과 맛', '맛')에서 더 이상 업그레이드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대안이니 오래 쓸 게 확실하고,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 중에서는 가장 저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2]




 우리는 돈에 맞추어 물건을 사는 일에 익숙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어도 예산을 초과한다면 구입하기 어려우니까요. 지금 있는 돈이 100만 원이고 꿈의 머신이 198만 원이라면, 당신의 경제관념은 198만 원짜리 물건을 진지하게 대안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가로막거나, 중간 지점인 149만 원 언저리에서 타협하도록 종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지요.


 하지만 당장의 사정에 맞춘 구매는 장기적으로 볼 때 돈 낭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경제난을 불러올 만큼 비싸지 않다면 살 물건은 언젠가 사게 되어 있고, 도구나 장비를 여러 단계를 거쳐 업그레이드하면 지출은 많아지고 한계효용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커피 애호가라면, 지금 갖고 있는 도구들을 한 번 돌아보세요. 그 중에는 커피에 처음 입문할 때 내가 저것을 사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만큼 비싼 물건도 있을 겁니다. 당신의 미래는 그렇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지도 않은 비싼 물건을, 미래에도 사지 않게 될까요?


 (변형된) 의사결정패키지를 활용하면, 지금 당장은 저것을 사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을 만큼 비싼 물건도 대안으로 올려놓고, 내가 그것을 왜 원하는지,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 직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저것을 산다면 오래 쓰게 될 지[각주:3],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 중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것인지도 판단할 수 있고요.


 이 과정을 따르다 보면 예산을 크게 웃돌거나 밑돌아서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았을 대안들[각주:4]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익숙한 방식[각주:5]을 따랐다면 아마 선택받지 못했을 대안을요. (변형된) 의사결정패키지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낯선 장소에서 괜찮은 대안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니까요.




 각주


  1. 본래 영기준예산의 의사결정패키지는 최저수준(감축된 예산으로도 할 수 있는 사업의 수준), 현행수준(현행 수준의 예산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의 수준), 점증수준(예산이 조금 더 늘어났을 때 할 수 있는 사업의 수준)으로 나누고 최저수준-현행수준-점증수준으로 올라갈 때 추가할 수 있는 +@를 설정합니다만,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하는 상황에서는 뭔가 +@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돈을 좀 더 들여 구입하는 품목을 바꾸는 식이 되므로 이렇게 변형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Ena Micro Easy보다 성능이 좋은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은 많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원하지 않고, 록키+실비아 조합보다 성능이 좋은 그라인더+머신 조합 또한 많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3안과 2.7안이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 중에서는 제품 중에서는 가장 저렴'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갖춘 제품이란, 사실상 '더 이상 업그레이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제품'을 의미하는 것이죠. [본문으로]
  3. 다른 물건으로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는다면 오래 쓰게 될 겁니다. 그리고, 구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찬장에 던져넣지 않을 물건이라면 오래 쓸 수 있겠지요. 내가 저것을 찬장에 던져넣게 될 지 계속 쓰게 될 지 판단하는 것은 의사결정패키지를 활용한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만, 물건을 사기 전에 꼭 해야 할 판단이기는 합니다. [본문으로]
  4. 앞 상황이라면 3안, 2.7안, 1.5안. [본문으로]
  5. 앞 상황이라면 100만 원에 맞추어 물건을 사거나 149만 원 언저리에서 타협하는 것.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