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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가끔씩 요리사가 "찬장에 ◯◯◯ 하나쯤은 다 있으시죠?" 하면서 신기한 재료를 꺼낼 때가 있습니다. 육두구라든가, 바질이라든가, 그레나딘 시럽이라든가… 그럴 때면 마음 속으로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를 외치고 싶어지지요.


 커피 생활이 길어지면서, 저희 집 찬장에는 두 종류의 원두를 담을 용기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백화수복 원컵에 뚜껑을 자작한 밀폐용기를 썼습니다. 이 때가 작년 10월 5일이었죠. 하지만 밀폐성능이 시원찮아 향이 달아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찬장에서 잠들어 있던 진공 밀폐용기를 꺼내서 쓰게 됩니다. 쿠바 크리스털마운틴을 구입한 날부터니까 10월 29일입니다. 진공으로 보관하는 이득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오를 무렵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보르미올리 피도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나중에 커피를 주문하면서 받은 푸쉬락도 마음에 들어서 진공 밀폐용기는 다시 찬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가 12월 중순입니다.


 나중에 보르미올리 피도 하나를 추가 구입하면서, 저의 찬장에는 세 개의 원두 보관 용기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닥터만커피에 한 번 더 주문을 넣어서 푸쉬락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찬장에는 보통 세 종류의 원두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먼저 산 원두가 떨어져 가지만 아직 다 먹지는 않은 '원두의 교체기'에는 네 종류의 원두가 들어차기도 하는데, 이 때는 락앤락이 잠깐 출장을 나옵니다.


 맛 좋은 커피를 추출하려면 신선한 원두를 사용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찬장에 원두를 셋이나 갖추어놓는 건 신선도 관리 측면에서 그다지 권장할 만한 사항이 아닙니다. 한 종류의 원두만 놓아둘 때에 비해 원두가 찬장에 세 배는 오래 머무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세 종류의 원두를 갖추어놓는 건, 반반커피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집에서 블렌딩을 하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블렌딩을 할 때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유용한 원두 몇 가지를 알게 되었고, "찬장에 인도네시아 만델링 하나쯤은" 항상 갖추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쯤에서 한 번 요리사 흉내를 내어, 집에서 블렌딩을 하는 재미에 빠진 커피 애호가의 찬장에 하나쯤은 있어야 할 원두의 목록을 제안하는 글을 써 보겠습니다.




 1. 산미가 강한 습식/반습식 가공 원두


 대부분의 경우, 산미를 빼 놓고 커피의 맛을 논하기 어렵습니다. 드립 커피를 추출할 때 물의 온도나 분쇄된 원두의 굵기에 신경을 쓰는 이유 중 하나가 산미의 표현이 달라지기 때문이고, 산지별 커피의 특성을 말할 때 바디감과 함께 빠지지 않는 맛의 요소가 산미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에스프레소 머신을 주로 다루는 커피 애호가나, 인도네시아 원두나 로부스타의 맛을 좋아하는 커피 애호가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 습식, 파나마, 탄자니아, 케냐 등의 커피를 묶을 수 있는 "산미가 강한 습식/반습식 가공 원두" 하나쯤은 찬장에 항상 갖추고 있는 편이 좋습니다. 습식/반습식 가공 원두는 건식 가공 원두에 비해 깔끔한 맛과 향을 표현하기에 좋고, 베이스 역할을 하는 원두와 섞었을 때의 결과를 예측하기도 쉬운 편이거든요. 물론 맛도 좋고요.




 2. 베이스로 쓸 만한 원두


 1번 항목에서 에티오피아가 찬장에 있다면 인도네시아 만델링이나 자바 등을, 케냐가 찬장에 있다면 브라질이나 콜롬비아 등을 택하는 편이 무난합니다. 이르가체페+브라질과 같은 부드러운 조합이나 케냐+만델링과 같은 강렬한 조합과 같은 무난하지 않은 선택 역시 가능합니다. 만약 1번 항목의 커피가 파나마나 탄자니아 같은 커피라면 무난한 선택은 따로 없을 것이고, 추구하는 맛과 향에 따라 선택을 하면 될 것입니다.


 1번 항목과 2번 항목을 갖추면 반반커피 프로젝트의 톱과 베이스를 갖춘 셈이 됩니다. 톱 역할을 하는 원두만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도 있고, 베이스 역할을 하는 원두만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도 있고, 둘을 섞어서 반반커피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3. 예멘이나 에티오피아의 건식 가공 원두


 톱과 베이스를 갖추었다면, 이제 '제3의 커피'가 필요합니다. 반반커피 프로젝트 그 다섯번째 글에 나온 여섯 가지 조합을 살펴보면, 예멘이나 에티오피아의 건식 가공 원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와인과 같은 느낌, 그리고 건식 특유의 조금은 진득한 느낌이 1번 항목의 톱이나 2번 항목의 베이스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맛과 향과 입 안의 감촉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예멘이나 에티오피아의 건식 가공 원두는 세 번째 우선순위로는 권할 만한 원두입니다.


 저는 이 원두를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의 만족감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1번 항목이나 2번 항목에 속하는 원두의 절반이나 2/3 정도만 사 놓아도 비슷한 속도로 소비하곤 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종류의 원두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라면, 재고 관리(?)를 할 때 이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와인과 같은 느낌'에 중점을 둔다면, 강배전을 하지 않은 케냐 원두를 3번 항목에 배치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때는 1번 항목에 케냐가 아닌 다른 원두가 있는 편이 좋습니다) 3번 항목에 케냐를 배치하면, 탄자니아+케냐와 같은 톱의 미세조정을 시도할 수도 있고 이르가체페+케냐와 같은 강렬한 산미의 블렌딩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건식 가공 원두'에 중점을 둔다면, 이르가체페 아리차 내추럴과 같은 원두를 3번 항목에 배치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다면 습식 이르가체페+건식 이르가체페와 같은 톱의 미세조정을 시도할 수 있겠지요.




 과테말라 안티구아, 코스타리카 타라주와 같은 원두들 역시 중요하긴 합니다만, 이들은 반반커피 프로젝트의 4분법 프레임에 끼워맞추기 애매하고, 따라서 앞서 말한 세 부류의 원두만큼이나 '찬장에 하나쯤은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글이 '반반커피 프로젝트' 시리즈에 속한다는 점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앞서 말한 세 부류의 원두가 항상 찬장에 자리잡고 있게끔 재고를 관리하는 편입니다. 가끔씩 베이스가 하나 더 들어오거나 건식 대신 다른 커피가 들어오는 경우는 있지만, 저 세 부류의 원두를 갖추고 있을 때 훨씬 안정적인 블렌딩이 가능하다는 걸 느낍니다. 여러분도 한 번, 찬장에 세 종류의 원두를 갖추고 집에서 블렌딩을 하는 재미에 빠져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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