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가끔씩 요리사가 "찬장에 ◯◯◯ 하나쯤은 다 있으시죠?" 하면서 신기한 재료를 꺼낼 때가 있습니다. 육두구라든가, 바질이라든가, 그레나딘 시럽이라든가… 그럴 때면 마음 속으로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를 외치고 싶어지지요. 커피 생활이 길어지면서, 저희 집 찬장에는 두 종류의 원두를 담을 용기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백화수복 원컵에 뚜껑을 자작한 밀폐용기를 썼습니다. 이 때가 작년 10월 5일이었죠. 하지만 밀폐성능이 시원찮아 향이 달아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찬장에서 잠들어 있던 진공 밀폐용기를 꺼내서 쓰게 됩니다. 쿠바 크리스털마운틴을 구입한 날부터니까 10월 29일입니다. 진공으로 보관하는 이득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오를 무렵 친구로부터 선물..
반반커피 프로젝트 그 첫번째 글을 올리고 넉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지요. 마음에 들었던 조합도 있었고, 그저 그런 조합도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한 번쯤 중간결산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셔본 반반커피 중에 인상적이었던, 또는 반응이 좋았던 조합 몇 가지를 모아 보았습니다. 먼저 소개하고 싶은 두 가지는 강렬한 맛이 나는 조합입니다. 1. 에티오피아 하라 + 인도네시아 만델링 일명 커피계의 막사. 쌉쌀함이 강하고 그 결이 거칠어 뭔가 제각기 날뛰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기름기 많은 식사를 하고 나서 한 잔 마시면 입안이 개운해지고 느끼함이 싹 씻겨나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삼겹살이나 자장면을 먹고 난 뒤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식사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반반커피 프로젝트는 블렌딩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접근법을 제시하여 주고() 섞는 원두를 둘로, 섞는 비율을 반반으로 고정하여 2차원 평면 위에 하나의 표로 정리하기에 좋아()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축적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데이터를 쌓다 보면 벽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산미], [-산미]라는 기준으로 베이스와 톱을 나누고 [+바디], [-바디]라는 기준으로 베이스1과 베이스2, 톱A와 톱B를 나누는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방법론에 있습니다. 이 틀에 따라 블렌딩을 진행하다 보면 그 결과물의 산미는 중간 수준으로 획일화되고 바디는 3단계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게 됩니다. 그 이상의 미묘함을 추구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두 종류의 원두를 반씩 섞는 방법으로는 내가 원하던..
'반반커피 프로젝트'를 처음 글로 쓰면서 저는 커피를 산미의 유무에 따라 베이스와 톱으로, 바디의 유무에 따라 베이스와 톱을 각각 1/2, A/B로 분류하여 1A, 1B, 2A, 2B의 네 가지 접근법을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각 분류에 잘 들어맞는 가장 전형적인 커피를 나열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겁니다. 베이스1 [-산미][+바디] : 인도네시아 베이스2 [-산미][-바디] : 브라질, 콜롬비아 등 톱A [+산미][+바디] : 케냐 톱B [+산미][-바디] : 에티오피아(습식), 파나마 등 실제로 마셔본 결과 몇몇 커피는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A의 톱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파푸아뉴기니는 생각보다 산미가 강하지 않았고 B의 톱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예멘이나 에티오피아 건식 역시 생각보다 산미가 강하지 않..
반반커피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겸, 글을 한 편 쓰고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음식을 만들면서 깨달은 평범한 진리는 "좋은 재료를 쓰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고기와 좋은 간장을 쓰면 쇠고기+간장+마늘+백세주+표고버섯·다시마 육수 정도의 간단한 레시피로도 맛있고 깔끔한 불고기를 만들 수 있지요. 한 잔의 커피를 추출하는 과정도 요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두를 쓰면 좋은 원두(볶은 원두)를 만들기 쉽고, 좋은 원두(볶은 원두)를 쓰면 맛있는 커피를 추출하기 쉽지요. 블루마운틴 커피의 맛과 향을 재현하기에 가장 좋은 원두는 블루마운틴입니다. 이것저것 섞어 봐야 블루마운틴 비슷한 물건이 나올 수는 있어도 블루마운틴과 정확히 같은 물건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
예전에 인도네시아 만델링을 마실 때, 실수로 탄자니아 AA를 조금 섞은 적이 있습니다. 신맛이 살짝 비치는 쌉쌀한 커피가 되어 무척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처음으로 블렌딩의 가치와 이점을 진지하게 인정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다양한 산지의 커피를 스트레이트로 마셔보자는 목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블렌딩이 된 커피를 사서 마시는 것은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됩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끝에, 저는 '반반커피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두 종류의 커피를 사서 각각 스트레이트로도 마셔 보고, 블렌딩해서도 마셔 보기로 말입니다. 반반씩 섞는 블렌딩이라면 커피의 맛과 향을 결정하는 주도적인 원두(편의상 '톱'으로 칭하겠습니다)와, 이 원두의 맛과 향을 뒷받침하는 원두(편의상 '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