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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 오리진이라는 말을 단순히 '다른 나라의 원두를 섞지 않은' 정도의 수식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제법 있고, 저 역시 그 정도로 이해해 왔습니다.



 네이버캐스트 <커피의 맛과 향을 깨우는 숭고한 작업-Coffee Roasting>편의 일부입니다. 스타벅스 홈페이지에 소개된 원두 종류(현재 스타벅스 매장에서 250g단위로 포장되어 팔리고 있습니다)를 보시면 알겠지만, 과테말라 안티구아, 케냐, 콜롬비아, 수마트라는 특정한 나라 또는 특정한 나라의 특정 지역(region)에서 수확된 커피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품종, 가공법(processing), 생산 농장, 농법(sun/shade grown coffee), 수확법 등은 제각각일 수 있지요.



 투썸플레이스에서 커피를 새로 출시했다는 보도기사의 일부입니다. 코스타리카, 수마트라, 케냐 등 특정한 나라에서 수확된 커피를 지칭합니다. 마찬가지로 품종, 가공법, 생산 농장, 농법 등은 제각각일 수 있지요. 어느 블로그 포스팅에 올라온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투썸플레이스는 특정한 나라에서 수확된 커피, 즉 다른 나라의 원두를 섞지 않은 커피를 싱글 오리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포스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싱글 오리진을 엄격하게 정의한다면 '단일 농장에서 같은 수확법, 같은 가공법을 사용한 커피'이고, 로스팅한 상태로 판매한다면 '같은 로스팅 프로파일로 볶인 커피'라는 단서가 추가됩니다. 이유는 SCAA의 조지 하웰이 자신의 로스터리를 만들면서 소비자에게 커피의 이력을 투명하게 전달할 목적으로 '싱글 오리진'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스페셜티 커피 업계의 걸출한 인물이 사용함으로써 (이전에는 그리 자주 쓰이지 않던 '싱글 오리진'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때문입니다.


 커피의 맛에 영향을 주는 요인에는 토양과 기후 외에도 품종, 가공법(processing), 농법(sun/shade grown coffee)등을 들 수 있습니다. 가공법과 수확법은 QC에 영향을 주어 커피의 품질을 바꿀 수 있습니다. (토양과 기후 조건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는) 같은 나라, 혹은 같은 나라의 같은 지역에서 재배된 커피라도 품종, 가공법, 농법, 수확법 등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질 수 있지요.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예가체프라고 흔히 불리는 그 커피입니다. 이 블로그의 용어와 표기법을 참조해주세요)는 에티오피아 하라와 제법 다른 맛을 내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가공법입니다. 이르가체페는 습식으로 가공되고 하라는 건식으로 가공되거든요.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되는 커피가 '에티오피아'라는 나라 이름으로 묶이지 않고 이르가체페, 하라, 시다모와 같은 지역 이름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차이 때문이라고 힐 수 있습니다.


 똑같이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되는 커피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는데(가공법이 이르가체페와 하라의 맛을 다르게 만든 유일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품종, 가공법, 농법, 수확법이 제각각일 수 있는 커피를(따라서 맛도 제각각일 수 있는 커피를) 단지 콜롬비아에서 생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콜롬비아'라 이름붙이고 "다른 나라의 원두를 섞지 않았으니 싱글오리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에티오피아 지도를 보고 갈까요?



 출처 : http://www.africa.upenn.edu/eue_web/r11_d.gif


 화면 오른쪽, Yergachefe라고 쓰인 곳이 이르가체페입니다. 지도에 붙은 단서 'All borders are unofficial and approximate'를 감안하더라도, 이르가체페가 에티오피아에서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은 미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이르가체페 지역은 Chamo 호수(551km²)와 Nechisar 국립공원(514km²)과 비슷한 면적으로 보입니다. 500~600km²정도겠네요. 서울특별시 면적(605km²)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작을 겁니다.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 woreda는 500~600km²(추산), 하라 region은 311km², 시다모 zone은 6538km²입니다. 아무리 넓게 잡아도 셋 다 1만km²보다 작은 땅덩어리죠.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 하라, 시다모 지역에서 수확한 커피를 섞은 다음 에티오피아 산(産) '싱글 오리진'으로 판매할 수 있을까요? "이미 각각의 지역 이름을 달고 팔리는 커피를 블렌딩한 게 무슨 싱글 오리진이냐"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인도네시아 자바와 만델링도 비슷할테고요. 그런데 114만km²의 콜롬비아, 196만km²의 멕시코, 855만km²의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커피가 콜롬비아, 멕시코, 브라질 산(産)으로 뭉뚱그려 불리고 가끔씩은 '싱글 오리진'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이르가체페, 하라, 시다모를 섞어 놓아도 싱글 오리진이라 주장하기 힘든 판에, 에티오피아 전체 면적인 110만km²보다 넓은 땅떵어리에서 생산된 커피를 싱글 오리진이라 부르는 게 과연 앞뒤가 맞는 이야기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싱글 오리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를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면 커피의 개성과 품질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와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큼한 신맛을 원할 때 케냐 커피를 찾는 식이죠. "케냐 커피는 상큼한 신맛의 커피"라는 연합(association)이 생기면 판매자는 케냐 커피를 볶을 때 상큼한 신맛을 살릴 수 있게 로스팅하고, 소비자는 상큼한 신맛이 나지 않는 케냐 원두는 케냐 원두가 아니라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이 강화된다는 것이 저의 분석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단순하고 강한 연합이 몇 개 있을 때 선택이 간단하고 편리해져서 좋습니다. 상큼한 신맛을 원한다면 케냐 커피를 찾으면 됩니다. 꽃향기를 원한다면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를 찾으면 됩니다. 흙냄새와 쌉쌀함을 원한다면 인도네시아 만델링을 찾으면 됩니다. 문제는요? 그 이상의 개성을 바랄 수가 없게 됩니다. 케냐(58만km²)나 콜롬비아(114만km²) 같은 넓은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나오는 커피가 죄다 '상큼한 신맛', '부드러운 맛'으로 통일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결국 케냐 커피가 대략 어떻다는 이야기는 이탈리아 사람 성격이 대략 어떻다는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대체로 맞는 이야기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가 모든 케냐 커피에(또는 이탈리아 커피에)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반례─세상을, 그리고 인식을 다채롭고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들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원두를 섞지 않은' 정도의 뭉툭한 의미로 싱글 오리진을 규정하고 그 특성의 목록을 정리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맛있고 독특한 커피를 만들려는 생산자와 로스터의 꿈과 의욕은 꺾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 커피는 너(나라 이름) 답지 않아." "나 답지 않다고? 나 다운 게 뭔데?" 같이 진부한 드라마 대본을 쓰면서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멀리도 왔네요. 사람들이 커피의 개성을 말살하겠다는 의도로 싱글 오리진을 '뭉툭한 의미'로 사용하는 건 아닐 겁니다(이건 의도확대의 오류에 해당되겠네요). 하지만 싱글 오리진을 '뭉툭한 의미'로 사용하다 보니 커피의 개성이 말살되고 나라 혹은 지역 단위로 커피의 특성이 통일되는 결과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후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커피 생산지 특유의 기후(microclimate)가 만들어낸, 독특한 풍미의 커피"라는 스페셜티 커피의 컨셉은 기본적으로 뭉툭하지 않은 의미로서의 싱글 오리진을 지향합니다. 스페셜티 커피의 지향과 그 의미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또 한 편의 글이 될 테니,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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