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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 : 구름다리 블렌드 (Skywalk Blend) 100g
입수일 : 2016. 9. 20.
입수처 : 루소랩 정동점
저의 여든일곱 번째 커피는 구름다리 블렌드였습니다.
루소랩 브루잉 마스터 클래스 고급 과정을 수강하며 만든 "나만의 블렌딩 커피"로, 루소랩의 싱글빈 케냐 AA Top과 인도 크리슈나기리를 배합한 것입니다.
Kenya AA Top 70%
India Krishnagiri 30%
<참고 : 이 블로그의 별점과 그래프>
중간 바디, 자몽·패션후르츠·석류의 끈끈달달새콤함(촉감/산미/맛), 다크초콜릿(맛), 볶은 곡물·깨(향), 땅콩(향), 후추·정향(향)
핸드 소트 결과는 양호했습니다. 결점두는 거의 없었고, 조가비 모양의 콩(shell)이 약간 있었습니다.
열대과일의 상큼함과 달달한 뒷맛
첫 모금에서 곡물의 구수함, 다크초콜릿의 쌉쌀함이 느껴집니다. 뜨거울 때에도 좋은 특성을 보여주는 편입니다. 조금 식으면 자몽·패션후르츠·석류와 같은 열대과일의 특성이 올라오는데, 농도를 조금 높이면 무척 진득해져서 바디감이 묵직해집니다. 인도 크리슈나기리가 케냐의 강렬한 산미를 조금 다듬어주고, 향미의 바탕에 향신료와 견과류의 노트를 뿌려줍니다.
열대과일의 상큼함과 달달한 뒷맛이 있는, 산미에 중점을 블렌드입니다. 따뜻하게 마시면 가볍고 상큼한 맛이 나고, 차갑게 해서 마시면 바디가 묵직해져 밸런스가 잡힙니다.
머리로 만든 커피
최악의 컨디션이었습니다. 잠도 못 잤고 온몸은 쑤시고 머리는 복잡하고 입안은 까끌까끌했고 냄새는 거의 맡을 수 없는 몸 상태. 감각에 기반하여 향미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했죠. 그래서 저는 이론에 기반한 분석적 접근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1. '향미의 사분면'에 기반한 싱글빈 분석
블렌딩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싱글빈의 약점 보완입니다. 하지만 약점 보완에 주력하다 보면 아무런 특징도 포인트도 없는, 지나치게 무난한 결과물이 나오기 쉽습니다. 싱글빈 A의 장점을 싱글빈 B가 죽이고, 싱글빈 B의 장점을 싱글빈 A가 죽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저의 접근법은, 허즈버그(F. Herzberg)의 동기-위생이론을 응용한 '향미의 사분면'에 기반한 싱글빈 분석입니다. 향미 노트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보다는 손이 많이 가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지만, 다음과 같은 장점 때문에 해볼 가치가 있는 작업입니다.
①향미의 존재+결점의 부존재라는 좋은 조합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향미의 존재' 칸에 좋은 노트가 많이 적히고, '결점의 존재' 칸에 결점이 적히지 않으며, '향미의 부존재' 칸에 이러저러한 아쉬움이 적히지 않고, '결점의 부존재' 칸에 (평범한 품질의 원두에서 한두 가지 나올 법한) 문제가 지적되지 않는다면, 그 싱글빈은 (싱글로 즐기기에도 좋지만) 블렌드 재료로 사용하기에 좋은 재료임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②'향미의 부존재'가 지닌 양면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 콜롬비아 원두를 섞으면 보통은 성공적인 마일드 블렌드가 됩니다. 다른 싱글빈이 지닌 거친 특성을 콜롬비아로 다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자바를 섞으면 보통은 무난하고 바디감 좋은 블렌드가 됩니다. 다른 싱글빈의 약한 바디감을 자바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든 블렌드는 지나치게 무난해서 (드립 커피로 추출하였을 때) 포인트 없는 결과물이 나오기 쉽습니다.
이는 (스페셜티가 아닌 일반 등급의) 콜롬비아·자바에 있는 '향미의 부존재' 때문입니다. (열대과일을 닮은 산미나 꽃향기 같은 개성 넘치는 노트를 기대하기는 어렵죠. 이러한 사항은 '이러이러한 점이 부족하여 아쉬움'이라는 형태로 '향미의 부존재'에 적히게 됩니다) 다른 싱글빈의 약점을 중화하면서 향미 노트가 이리저리 튀지 않게 한데 모아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싱글빈의 개성과 디테일을 죽일 수도 있는 거죠. 이것이 '향미의 부존재'가 지닌 양면성입니다.
③'결점의 존재'를 의식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 향미 노트를 나열하다 보면 결점을 건너뛸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향미(의 존재) 위주로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하는 업계의 관행(…?) 때문이기도 하고, 흠을 적게 잡고 지적을 적게 할수록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도를 닮은 산미의 끝이 좀 떫을 수 있고, 우디(woody)한 향미의 끝에 텁텁한 흙 냄새(dirty)가 감지될 수도 있습니다. 결점을 적을 칸이 따로 없다면 포도, 우디(woody)만 적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결점을 적으라고 만든 칸이 따로 있다면 내가 느낀 결점 한두 개는 적어넣으려고 노력은 하게 될 겁니다.
향미의 사분면에 기반한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습니다.
1) 향미의 존재 + 결점의 부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조합입니다.
2) 향미가 좋고 결점이 없는 싱글빈을 배합하여 부족한 점(심각하지 않은 향미의 부존재)을 상호 보완하는 것을 블렌드의 목표로 잡습니다.
3) 향미가 밋밋하거나('향미의 부존재'), 결점이 도드라지는('결점의 존재') 싱글빈은 블렌드에 가급적 넣지 않습니다.
2. 온도에 따른 노트의 변화 추이 기록
유대준 씨의 <Coffee Inside>에 나온 그래프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기록법입니다.
아주 뜨거울 때에도 좋은 특성을 보이는 원두가 있습니다. 예전에 리뷰한 콜롬비아 라 포르투나가 좋은 예입니다. 뜨거울 때에는 그리 좋지 않다가 적당한 온도에 진입하면 좋은 특성을 보이는 원두도 있습니다. 비비다이어리의 모닝 블렌드가 가장 전형적인 예입니다. 적당히 식었을 때 노트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원두도 있습니다. 커피플랜트의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 G1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뜨거울 때에는 그리 좋지 않은 원두만 넣으면, 그 블렌드로 내린 커피는 뜨거울 때 맛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약간 식었을 때 맛이 나빠지는 원두만 넣으면, 그 블렌드로 내린 커피는 해당 온도에서 향미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모든 온도 구간에서, 싱글빈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블렌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록법은, 온도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향미의 사분면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 어느 온도에서 어떤 노트가 나타나는지를 기록하고, 취약한 온도 구간이 있다면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싱글빈을 섞어넣는 식으로 블렌드를 계획한다면 특정 온도에서 약점이 드러나는 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케냐의 상큼함을 베이스로 삼아
수업 전 루소랩에 전화를 걸어 이날 수업에 어떤 원두가 나오는지를 알아냈을 때는, 에티오피아+브라질+인도 조합의 땅콩땅콩한 블렌드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현장에서 테이스팅을 하고 향미의 사분면에 기반한 분석과 온도에 따른 노트의 변화를 기록하고 케냐의 상큼함을 베이스로 삼은 블렌드를 만들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좋은 노트가 많이 나타났고, 딱히 취약한 온도 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1안은 케냐 50%, 인도 25%, 브라질 25%였습니다. 케냐의 강한 산미를 누그러뜨리고, 향신료의 특성을 좀 보태는 블렌드였죠. 테이스팅 결과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피니시가 약하다는 강사의 피드백을 받아들여 애프터테이스트를 보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업에 나온 원두 4종 중 인도와 브라질의 애프터테이스트가 약하고 케냐의 애프터테이스트가 가장 알찼으므로, 애프터가 좋은 케냐의 비율을 높이고 애프터가 약한 원두를 빼기로 했습니다. 향신료 특성이 있는 인도를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브라질을 빼기로 하고, 케냐 70% 인도 30%의 제2안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거… 그냥 케냐인데요?"
ㅋㅋㅋㅋㅋㅋ
블렌딩을 하다 보면 특정 싱글빈에 꽂힐 때가 있는데, 꽂혀서 그 비율을 자꾸 높이다 보면 어느새 그 원두 맛이 나 버린다고 합니다. 제2안도 그런 식으로 나온 결과물이었던 것이죠. 그래도 밸런스 측면에서 케냐 단종보다는 낫다니 다행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제3안을 테이스팅할 시간은 없었고, 제1안과 제2안 중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저는 제2안을 택했습니다.
블렌드의 이름, 포지션(타겟), 블렌드에 대한 설명을 하는 PT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블렌드는 오전의 커피타임에 어울리는 상큼한 향미를 지녔기에, 오전의 휴식을 형상화할 수 있는 공간인 '구름다리'를 골랐습니다. 건물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에서 바람을 쐬며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느껴지는(혹은 느껴진다고 믿고 싶은) 네이밍이었죠. 포지션은 '나른한 오전,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마시기 좋은 블렌드', 한 줄 설명은 '열대과일처럼 상큼하고 뒷맛이 달달한 커피'였습니다.
부록 : 루소랩의 싱글빈
이날 수업에 나온 원두 4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브라질 Monte Alegre
에티오피아 Sidama Natural Decaf
인도 Krishnagiri
케냐 AA Top
브라질 몬테 알레그레의 드라이 아로마는 고소했지만,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뜨거울 때와 미지근할 때 향미가 밋밋해지는 취약점이 있었고, 단맛이 부족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시다모 내추럴 디카페인은, 디카페인 원두에 대한 저의 편견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좋았습니다. 땅콩·꿀·캐러멜을 닮은 달콤한 드라이 아로마, 달달한 뒷맛, 곡식·견과류·고구마의 구수달달한 향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드라이 아로마에 비해 추출한 커피의 향미가 좀 약한 점이 아쉬웠고, 향신료의 노트가 없어 인도 크리슈나기리에 밀려났습니다.
인도 크리슈나기리의 드라이 아로마는 약간 고소했고, 향신료의 노트가 감지되었습니다. 추출한 커피에서도 향신료의 특성이 드러났고, 보리·견과류의 구수함과 단맛과 같은 좋은 특성을 지녔습니다. 온도가 낮아지면 바디감이 묵직해져 아이스 커피를 만들어도 좋은 원두입니다.
케냐 AA Top은 싱글빈으로 즐기기에도 좋은, 산미가 강하고 바디가 좀 가벼워서 밸런스가 좀 약하다는 점만 빼면 특별한 취약점이 없는 원두입니다. 드라이 아로마에서 자몽과 열대과일의 상큼함이 느껴졌고, 향미에서는 열대과일의 상큼함과 다크초콜릿의 쌉쌀함과 같은 노트가 감지되었습니다. 뜨거울 때부터 식을 때까지 약점이 드러나는 구간이 없었고, 차갑게 식으면 산미가 도드라져서 아이스 커피를 만들어도 좋은 원두입니다.
나만의 블렌딩 커피를 만드는 루소랩의 브루잉 마스터 클래스 고급 과정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구상→각 재료 테이스팅→각 재료(싱글빈)로 추출한 커피를 비율대로 혼합하여 테이스팅→블랜드 샘플을 만들어 추출한 다음 테이스팅→평가/피드백/결정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습니다. 좋은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루소랩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열대과일의 상큼함과 달달한 뒷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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