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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 :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 (Panama Esmeralda Gesha) 100g

 제품명 : 폴 바셋 그랑 크뤼 Panama Esmeralda Geisha

 구입일 : 2016. 12. 30.

 구입처 : 폴 바셋


 저의 여든여덟 번째 커피는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였습니다.



 봉투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쓰여 있었습니다.


 농장 : Hacienda La Esmeralda

 농장주 : Price Peterson

 고도 : 해발 1500m

 품종 : Gesha

 가공방식 : Washed

 Tasting Note : 복숭아, 레몬그라스, 자스민, 민트, 꿀


 원두 카드에 적힌 폴 바셋의 한마디(Paul's Comment)는 다음과 같습니다.


 에스메랄다 농장은 뛰어난 게이샤 품종의 커피 생산으로 각 대회에서 10회 이상 1등을 수상하며 커피 경매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로써 전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는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이샤 커피를 Paul Bassett 매장에서 선보입니다.


 판매자는 이 원두를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Panama Esmeralda Geisha)"로 표기하였으나, 저는 에티오피아의 지역 이름(Gesha : Keffa Zone에 속한 Woreda)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게샤(Gesha)'로 표기하였습니다. (<이 블로그의 용어와 표기법> 참조)



<참고 : 이 블로그의 별점과 그래프>


 가벼운 바디, 오렌지·레몬·히비스커스(산미), 다크초콜릿의 쌉쌀함(맛), 망고의 달착지근함(맛), 감귤(맛/향), 마카다미아·아몬드·땅콩(맛/향), 볶은 깨(향), 후추(향), 바닐라(향), 꽃(향)


 커피라는 취미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와 마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파나마 커피경진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고 Don Holly가 "컵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감탄한 일(exclaimed that he had seen the face of God in that cup)이 유명해지면서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샤는 '신의 커피'라는 경외 섞인 명성을 얻었고, 그 이후로도 전설적인 명성을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커피 마시러 들른 매장에서 이틀 전에 볶은 에스메랄다 게샤를 발견하고(배송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사실상 갓 도착한 원두인 셈입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싶어 구입했습니다. 예전에 호주 마운틴 톱을 리뷰하며 형편없는 로스팅에 실망한 적이 있었는데, 아홉 달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로스팅과 QC가 개선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마침 근무일정에 오프(off)가 충분히 깔려 있어서 리뷰를 진행하기에 좋은 타이밍이기도 했습니다.


 로스팅 상태는 양호했습니다. 색상도 균일한 편이었고, 그슬린 원두나 태워먹은 채프도 없었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근무를 하느라 좀 지친 상태로 몇 달 만에 원두 봉투를 개봉하니 만사가 귀찮아져서 핸드 소트를 생략했는데, 결점두가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생두의 품질도 준수한 것 같았습니다. (모레니냐 포르모자를 한알 한알 쪼개가며 원두를 정제하던 시절로는 못 돌아갈 것 같네요)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를 개봉하면 어마어마하게 고소한 냄새가 납니다. 그라인더로 원두를 분쇄하면 구운 김이나 볶은 깨에서 풍겨나올 법한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집니다. 엘 인헤르토 2014년 COE 경매분 이후로 오랜만에 체험하는, 감동적인 첫인상입니다.


 산미의 양감이 풍부하지만, 찌르는 느낌이 강하지 않아 그 결이 매끄럽습니다. 산미가 뜨거울 때에도 감지되며, 카카오의 쌉쌀함과 견과류의 기름진 고소함과 어울려 초콜릿-견과류-산미의 독특한 연합을 이룹니다. 적당한 온도에 진입하면 과일의 상큼함과 달콤함, 게샤 특유의 감귤계 향미(flavor)가 한데 모여 레몬청으로 만든 레몬차 같은 음료가 됩니다. 미지근한 온도에서는 망고를 닮은 느끼한 단맛과 달착지근함이 느껴지고, 더 식으면 강한 산미가 다시 올라옵니다.


 수율을 낮추면 초콜릿과 견과류의 노트가 조금 뒤로 물러나고, 히비스커스 같은 어마어마한 산미가 곧바로 쳐들어옵니다. 산미를 즐기기에는 좋으나, 초콜릿-견과류-산미의 연합이 무너져 복합성이나 깊이감이 부족해집니다.


 약간 바닐라 같은 노트는 고소함과 달달함 모두에 윤기를 더합니다. 후추를 닮은 향신료의 힌트(hint)는 마일드로 기울어진 커피에 최소한의 균형감을 부여합니다(캐러멜 마키아토를 저지방 우유로 주문하는 것처럼, 실효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죄책감을 덜기 위한 타협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요). 방 안에 남는 향기가 달콤하고 뒷맛이 무척 깔끔해서, 기분 좋은 여운이 오래 갑니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는 충분한 양의 원두를 투입해서, 충분한 양을 추출할 필요가 있는 커피입니다. 농도가 낮으면 바디감이 물 같아지고 수율이 낮으면 복합성이나 깊이감이 부족해져서, 부드럽고 산미가 좋기는 하지만 밑천이 무척 짧은 커피가 됩니다. 초콜릿-견과류-산미의 연합, 과일의 상큼함과 달콤함 같은 좋은 특성은 높은 농도와 수율에서 잘 드러납니다. 평소보다 조금 가늘게 분쇄하여 티포트 브루 커피로 추출해도 잡맛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만큼 깔끔해서,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수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높은 수율, 높은 농도로 추출해서 식혀 아이스 커피로 만들면 꽃향기와 과일의 상큼함, 고소달달함을 즐기기에 좋습니다. 우수한 특성을 지닌 원두를 아이스 커피로 만들면 디테일이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는 오히려 아이스 쪽이 디테일이 좋고 균형감도 괜찮았습니다. 전반적인 인상은 매우 좋았지만 '이거다' 싶은 탁월함이 없어 별 넷을 주려던 저의 마음을 돌려놓은 최후 변론(?)은, '티포트로 술술 내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마셔도 맛있는'—돈은 조금 있지만 시간은 정말 없는 직장인에게 한없이 상냥한(…) 특성이었습니다.


 그 공급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부드럽고 달콤한 마일드 커피라는 점에서, 호사가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한 명성을 지녔고 그 명성에 걸맞는 가격이 매겨졌다는 점에서,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의 뒤를 이을 럭셔리 커피로 손색 없는 명품입니다. 별 여섯짜리 원두에 비해 조금 평범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흠 잡을 데가 없고 흠 잡힐 만한 데도 없는 그 무난함과, 무난함을 잃지 않으면서 갖춘 좋은 특성들(산미, 고소함, 달콤함과 몇몇 디테일들)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커피를 대량 생산해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마시는 사람, 아이스 드립을 좋아하는 사람, 호화찬란한 콜드 브루 커피를 한 번 내려 보고 싶은 사람, 전설적인 커피를 맛보고 싶은 사람, 원두를 선물해야겠고 좀 고급이면 좋겠는데 이 스페셜티가 좋을까 저 COE가 좋을까 고민이 되는 사람, 블로그에 포스팅하거나 인스타그램에 자랑할 거리가 필요한 사람, 이 모든 분들께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를 추천합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의 뒤를 이을 럭셔리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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