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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 : 파나마 게샤 블렌드 (Panama Gesha Blend) 200g

 구입일 : 2015. 3. 5.

 구입처 : 통인동 커피공방


 저의 쉰두 번째 커피는 파나마 게샤 블렌드였습니다.



 원두 이름에 '블렌드'라는 말이 들어간 까닭은, 파나마의 여러 농장에서 사들인 게샤 품종의 생두를 한 데 모아 로스팅했기 때문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싱글 오리진은 '단일 농장에서 같은 수확법, 같은 가공법을 사용한 커피'이기 때문에, 같은 나라에서 생산된 생두를 섞어도 블렌드일 수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레디쉬 코코의 포장지에 '블렌드'라는 말이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지요.


 저는 파나마 게샤의 존재를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품종을 '게이샤'가 아닌 '게샤'로 표기한 이유는 이 블로그의 용어와 표기법에 나옵니다) 2013년 6월에 올린 글 <본격 비싸고 귀하신 원두 이야기>에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샤가 처음 언급되고, 2013년 5월의 <형용사 지도를 활용한 커피 원두의 선택>에 파나마 에스메랄다가 언급되는 걸 보면, 커피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에스메랄다 농장과 게샤를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게샤에 손을 댈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았습니다. 비쌌거든요. 나인티플러스나 스페셜티 커피 등을 취급하는 로스터리에서 게샤는 보통 100g에 3만 원 안팎의 가격에 팔립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엘 인헤르토 COE 경매분을 가볍게 뛰어넘는 값이죠. 그리고 게샤는 약배전~중배전의 범위에서 로스팅 포인트를 잘 잡아야 제 맛이 난다고 하는, 꽤나 까다로운 커피입니다. 게샤의 특성에 맞는 로스팅을 할 줄 아는 곳에서 사야만 하죠. 싼 값에 게샤를 팔고 있는 곳이 가끔 보여도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아서(?) 게샤 구입은 계속 뒤로 미뤄지기만 했습니다.


 통인동 커피공방의 파나마 게샤 블렌드는 가격 조건이 아주 좋았습니다. 파나마 게샤를 맛보고 싶었던 저에게는 (보통은 유명하고, 그만큼 비싸게 마련인) 단일 농장의 게샤가 아니라는 점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파나마 게샤를 200g에 1만 6천 원 정도에 살 수 있다는 게 중요했죠. 예전에 여기에서 구입했던 짐마 G2 내추럴이 꽤 만족스러웠으므로 로스팅 실력도 믿을 만했습니다. 싸고 믿을 만한 게샤를 찾았으니, 지르는 것은 당연한 순서지요.




 택배를 수령하자마자 핸드 소트를 실시했습니다. 부서진 콩과 실버스킨이 붙어 있는 콩이 조금 나왔을 뿐이어서 많이 놀랐습니다. 원두 200g에서 나온 결점두가 열 개가 안 되었는데, COE 커피도 이 정도로 상태가 좋은 경우는 드뭅니다. 출발이 아주 좋았습니다.


 추출을 해 보았습니다. "레몬, 오렌지, 혹은 그 외 감귤 계열의 flavor"로 알려진 게샤의 독특한 향미는, 뜨거운 물을 사용하는 세 가지 추출법(터키시 커피, 파보일드 커피, 티포트 브루 커피)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귤 같은 산미'가 아닌 '감귤 같은 flavor'—산미가 아닌, 향과 맛 차원에서 감귤을 닮았다는 점이 대단히 특이합니다.


 다구치 마모루의 책 <스페셜티 커피대전>[각주: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 품종이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것은 1931년, 코스타리카로 건너간 것은 1953년이라고 한다. 그 후 파나마로 건너갔는데 생산성이 낮아서 사랑받지 못했다. 운명의 장난만 없었다면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으나 2004년 파나마 국제 옥션 '베스트 오브 파나마'에서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이샤가 사상 최고치로 낙찰되면서 커피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중략)

 게이샤를 일약 스타로 만든 것은 '모카 향'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다.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한 야생종이므로 에티오피아, 모카와 향미가 비슷한 게 신기할 것도 없지만, 감귤계의 플레이버와 얼그레이 홍차를 떠올리게 하는 애프터 테이스트는 다른 커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옥션의 국제 심사원으로부터 만점을 받은 것은 아마도 다른 품종에서는 볼 수 없는 압도적인 개성의 힘일 것이다. 누가 마셔도 게이샤라는 것을 알 정도로 '캐릭터'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pp.49-52)


 물론 게이샤는 유니크한 개성을 지닌 품종이지만 레몬티와 같은 향기를 경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굳이 비싼 돈을 내고 레몬티 같은 커피를 마실 필요는 없다. 레몬티를 마시면 된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필자 역시도 게이샤의 개성은 존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커피의 풍미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이야기일 뿐 감귤계의 향기가 너무 돌출되면 오히려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균형의 문제다. (pp.52-53)


 게이샤는 감귤계의 독특한 플레이버를 특징으로 한다. 이 플레이버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 최대의 장점인 이 플레이버가 사라지면 본전도 못 찾는다. … 원리 원칙상으로는 '주름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C타입의 콜롬비아나 탄자니아의 베스트 포인트에 맞추면 이른바 '게이샤다움'이 사라지고, 평범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보통 커피로 전락하고 만다. (p.76)


 게이샤 본연의 맛을 살린다는 것은 감귤계의 향기를 살린다는 의미로서, 향기가 사라져 버리면 가장 소중한 재산을 잃는 것과 같다. (p.108)


 이 정도면 찬양에 가까운 호평이죠. 다행히 통인동 커피공방의 파나마 게샤 블렌드는 이 격찬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게샤다움'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게샤의 감귤 같은 flavor를 감상하기 위해 이름난 농장의 값비싼 게샤를 살 필요가 없다는 점 또한 알려 주었고요.


 제가 주로 사용하는 추출법 중, 뜨거운 물을 사용하는 추출법이 세 가지가 있는데—터키시 커피, 파보일드 커피, 티포트 브루 커피—, 셋 중에서도 터키시 커피 쪽에 좀 더 무게를 둡니다. 산미와 바디감(내지 복합적인 맛)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 잡힌 맛을 잘 내어 주고, 커피의 맛과 향을 잘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두를 사면 터키시 커피로 먼저 맛을 보곤 하고, 터키시 커피로 추출한 결과를 중심으로 리뷰를 작성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파보일드 커피나 티포트 브루 커피에서 강점을 보여, 해당 추출법에 무게를 두고 리뷰를 작성할 때도 있습니다)




 터키시 커피로 추출한 파나마 게샤 블렌드는 감귤 같은 flavor가 상당히 강했습니다. 다크초콜릿 같은 감촉과 중간 정도의 바디감, 조금은 풀 같은 쌉쌀함, 어느 정도의 산미 또한 감지되었지만 감귤 같은 flavor가 지배적이어서 다른 디테일이 감귤을 뚫고 올라오지 못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하면 감귤 같은 flavor가 조금 줄어들어 다른 특성이 드러납니다. 풀 같은 쌉쌀함이 드러나고, 코나처럼 맑은 액체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감귤이 먼저 쳐들어오는 터키시 커피와 달리, 산미가 올라올 때 감귤 같은 flavor가 함께 올라옵니다. 게샤로 추출한 커피는 게샤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결과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커피는 커피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귤차'가 아닌 '감귤 느낌이 나는 커피'에 가까워졌다고 좋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커피다우면서 재미있는 산미(신맛, 감귤 같은 맛, 감귤 같은 향이 어우러진)를 내어 주는 파보일드 커피 쪽이, 감귤의 습격인 터키시 커피 쪽보다는 마음에 듭니다.


 티포트 브루 커피로 추출한 결과물이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보통은, 파보일드 커피로 추출한 결과물이 괜찮은 경우—즉, 맑음을 취하는 것이 더 좋은 원두의 경우 그것을 티포트로 추출하면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올 때가 많은데, 가끔씩 이런 의외의 결과가 나올 때가 있어 티포트 브루 커피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감귤의 습격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감귤 같은 flavor가 강해지는데, 풀 같은 쓴맛은 줄어들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상큼한 느낌을 줍니다. 복합적인 맛은 그리 강하지 않으며(터키시 커피 쪽에서 언급한 중간 정도의 바디감은, 복합적인 맛보다는 쓴맛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네요), 다크초콜릿 같은 감촉과 산미가 잘 드러납니다. 콜롬비아, 브라질, 에티오피아 커피에서 찾을 수 있는 달달구수함도 조금 느껴지고요. 티포트 브루 커피와 비슷한 특성을 가진 프렌치프레스로 추출해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콜드 브루 커피로도 추출해 보았습니다. 게샤의 독특한 감귤 같은 flavor가 콜드 브루 커피에서는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했거든요. 의외로 감귤의 느낌은 별로 나지 않았고, 풀 같은 쌉쌀함과 꽃향기를 닮은 aroma가 가득한 커피가 나왔습니다. 바디감이 조금은 우유 같았고요. 뜨거운 물을 사용하는 추출법과 전혀 다른 결과여서 좀 놀라웠습니다.




 <본격 비싸고 귀하신 커피 이야기 [2]>에서 말했던 페레로로쉐를 이렇게 또 한 알 꺼내 먹었습니다. '비싼 커피' 태그를 붙일 만큼 높은 가격대의 게샤는 아니지만, 통인동 커피공방의 파나마 게샤 블렌드는 감귤 같은 flavor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커피였습니다. 다음 번 페레로로쉐는 아마 호주 스카이베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커피를 파는 인터넷 판매자를 알고 있거든요. 그 다음은… 글쎄요. 세인트헬레나 커피나 레위니옹 부르봉 포앙튀는 영국 여행이라도 떠나야 사서 들고 올 수 있을 것 같네요. 어째 영국 다녀오는 길에 커피를 사 오는 게 아니라, 커피를 사기 위해 영국 여행을 떠나는 꼴이 되는 것 같은데… 하는 수 없지요.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5 커피엑스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음 번 원두는 그곳에서 구입한 물건이 되겠지요. 참가업체 리스트가 올라왔고 마음 속 장바구니(ㅋㅋㅋ)에도 몇 가지 커피가 자리잡았으니, 냉동실에 있는 원두로 커피를 마시며 그 날을 기다려야겠습니다.




 각주


  1. 다구치 마모루 지음, 박이추·유필문·이정기 공역 (2013) <스페셜티 커피대전> 광문각. (요약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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